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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최저임금 1만원, 국회의원에게 빚 갚으라고 하자

또바기1957 2016. 6. 2. 12:50

20대 총선의 키워드는 ‘청년 투표’였다.

2030세대의 투표율이 지난 선거에 비해 급격히 올랐고

그들의 상당수가 야당을 선택해 여소야대를 만들어냈다는 분석이 줄을 이었다.

 

투표전날까지도 여야를 막론하고 이런 선거결과를 예측한 정당은 없었다.

야당의 승리는 야당이 전략을 잘 짜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유권자들이, 세밀하게 보면 젊은 세대가 만들어 준 것에 가깝다.

즉 야당은 젊은 세대에 빚을 진 셈이다.

 

선거 막판 새누리당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좀처럼 선거에서 정책 쟁점이 형성되지 않다가 ‘최저임금 인상’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새누리당에서 20대 국회 임기 내에 8000~9000원으로 인상하겠다는 발표를 했다가,

인상한 효과가 나게 하겠다고 급수정했다.

이미 야당들은 2020년 혹은 2019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을 내건 상황이었고

진보정당들은 ‘지금 당장 1만원’을 내걸었다.

새누리당도 입장을 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고,

부랴부랴 인상안을 냈다가 당내 혼란이 빚어진 촌극이었다.

 

2030세대가 투표하겠다는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그 세대에 가장 민감한 정책이 쟁점으로 떠올랐으니 새누리당인들 외면할 수 있었을까.

헛발질을 하더라도 선거때는 ‘일단 go’를 외치게 돼 있다.

어찌되었든 여야를 막론하고 최저임금은 올려야 한다는 공감대는 마련됐다.

선거결과가 여소야대가 됐으니 최저임금은 올라야 정상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과연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은 가능할까?

최저임금은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노동계에서 추천된 9명과 사용자단체에서 추천된 9명,

정부에서 추천하는 공익위원 9명으로 구성된다.

 

어라? 국회는 낄 자리가 없다.

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국회가 최저임금을 결정하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렇다. 법을 바꾸면 된다.

여소야대가 됐다는 것은 최저임금법을 고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기다린다고 법이 바뀔까.

지금까지의 한국 정치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투표하면 세상이 바뀐다’고 야당이 주장했다.

그래서 투표를 했다.

 

하지만 투표만 했다고 알아서 바꿔주지 않는다.

이번엔 ‘투표를 했으니 세상을 바꾸라’고 또 떠밀어야 한다.

법은 국회의원이 만들지만 누군가 떠밀지 않으면 좀처럼 앞으로 가지 않는다.

특히 최저임금과 같이 이해관계가 뚜렷한 법안일수록 그렇다.

누가 더 강한 힘으로 떠미는가에 따라가게 돼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사용자들’은 항시적으로 국회를 떠민다.

수시로 토론회를 열고 의원들과 정당들을 압박한다.

보수언론을 동원해 늘상 여론을 만든다.

이미 보수언론 ‘최저임금 올리면 일자리 줄어든다’고 난리가 아니다.

 

세계적 추세가 최저임금 대폭 인상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목소리의 크기가 다르다.

이제 최저임금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떠밀어야 할때다.

예전에는 떠밀어도 떠밀리는 야당이 ‘우리가 소수라 안돼요’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저임금 1만원 약속을 지켜라’고 그들을 떠밀면 된다.

야당을 다수로 만들어줬으니 야당이 선거 때 약속한 정책을 법제화 하면 되는 일이다.

혹자들은 ‘대안없는 주장을 하지 마라’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권이 할 말은 아니다.

정치인은 국민의 요구를 여기저기 잘 따져봐서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면 그 대안은 이미 만들어 진 게 아닌가.

 

남은 것은 ‘국민의 요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이제 시작될 여소야대 국면에서 국민들이 할 일은 ‘요구’를 하는 것이다.

떠밀자. 지독하게도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벼랑끝으로 떠밀자.

최저임금을 올리지 않으면 내년 대선은 어려울 것이라고.

그러면 오랫동안 노동계는 물론 젊은 세대가 바라마지 않았던 ‘세종대왕 최저임금’은 실현되지 않을까.

그게 ‘여소야대’ 국회를 맞이하는 국민의 자세이자, ‘여소야대’를 만들었던 젊은 세대의 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