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자료](19)/˚♡。─-국외관광

[스크랩] 겨울 무지개

또바기1957 2008. 6. 26. 00:40

눈 속에서 피는 동백꽃을 보고자 소설을 쓰는 

황순원 선생님과 거제도에 가보기로 했다.
장승포에서 통통배를 타고 한 시간 가량 가면 

등대가 있는 조그만 섬이 있는데 거기엔 동백나무가 빼곡하다는 것이다.


서울서 떠날 때는 추워서 몸을 움추렸다. 

우리가 거제도에 닿았을 때에는 1월 하순이었는데도 봄날씨 그대로였다.
조그만 배를 전세 내었다. 바람은 그리 차지 않았다. 

 

거의 섬에 이르렀을 때 빗방울이 후둑후둑 지더니 

순식간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바다 한 가운데 서는 게 아닌가.


"야아! 저 무지개."


바다에서 무지개를 보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겨울에 서는 무지개가 아닌가.


´겨울 나그네´가 겨울 바다에서 ´겨울 무지개´ 를 본다는 생각이 든다. 
눈 속에 빨갛게 피는 동백꽃을 보려고 온 우리에게 

환영의 무지개를 세워 주는 것인가. 

우리의 배가 무지개 속으로 들어가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순간 나는 4월에 본 ´봄 무지개´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이었다. 

 

봄 무지개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한 20여 년 전의 일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후퇴하는 통에 38선 이북이었던 

해주는 피난민으로 도시가 콩나물 시루같이 가득했었다. 


밤 사이에 중공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새벽(12월 23일)에 

남하의 길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노비에 보태 쓰라고 내가 장가들 때 

혼수감으로 마련해 두었던 명주 세 필과 금붙이를 

옷장 깊숙히에서 꺼내 바랑에 넣어 주셨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이른 새벽 친구와 함께 해주를 떴던 것이다.
그렇게 어려웠던 38선을 싱겁게 넘어 남한 지역에 이르렀다. 

이지역에서 이미 경찰들은 후퇴하고 남아 있는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피난민 속에 

빨갱이가 끼어 있지 않나 하고 길목에서 조사를 하고 있었다. 


동행인 박선생은 생김이 좀 우람하고 

말투가 무뚝뚝해서 그런지 조사를 몹시 당했다. 

또 한 마을에 이르러 북에서 피난 오는 길이라고 하자 

다짜고짜 창고에 가두는 것이었다. 


자치대원 가운데 학생이 있어 우리의 이야기를 듣더니 

다음날 풀어 주었다. 그날이 성탄절이었다.

 

38선 쪽으로 약 3킬로 가면 교회가 있다고 해서 

그 학생의 안내로 저녁예배에 참가했다. 
밖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교회 안은 무척 차분했다. 

삼십 여명의 교인이 모였다. 

 

축가로 스무살 안팎인 아가씨가 찬송가를 부르는데 밝고 고운 음성이었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여겨졌다. 


예배가 끝나고 다과회가 있었다. 

우리의 형편을 들은 장로님이 지금 개성 쪽은 전선이니 갈 수 없고, 

천상 배를 타고 가야 할텐데 배가 없다고 하며 

유엔군이 곧 올라올 것이니 당분간 이 마을에 있으라는 고마운 제의였다. 


이 ´바루개´라는 마을은38선에서 남쪽으로 8킬로 쯤 떨어져 있는 30호 남짓한 마을이다. 

교인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며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며칠이 지났다. 성탄절에 독창을 한 아가씨네 집 식사 차례였다.
닭을 잡고 두부를 하고 떡을 하는 등 성찬을 베풀어주었다. 
이 아가씨는 병석에 누워 있는 어머니와 아래로는 동생들이 있었다. 

마을 학생들에 의하면 아버지는 빨갱이로 

6.25 전에 이북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저녁 아주 늦게까지 그네네 집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잠시나마 즐겁게 해드렸다. 
그런데 그네가 왼쪽 발을 약간 저는 것이 아닌가. 

교회서 처음보았을 때에는 저는 것 같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우리를 배웅하러 나온 그네에게 

발을 다쳐서 몹시 불편할 텐데 성찬을 베푸느
라고 수고가 많았다고 고마움을 표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알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전다는 것이다. 
고마움의 정을 표한다는 게 그네의 아픈 점을 건드렸다고 생각
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괜히 그네에게 발 이
야기를 꺼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을에서 신세를 지기 시작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20리 밖 면소재지에 인민위원회가 들어서고 내무서가 들어섰다.
내무서에서는 북에서 온 사람은 즉시 돌아가라는 것이며 

만약 가지 않고 발각되는 날이면 숨겨준 사람까지 엄단하겠다고 엄포를놓았다.


그렇지만 교인들은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있으라는 것이다. 
다시 한 달이 지나고 내무서원이 자주 오고 

인민위원회에서 마을에 드나들어 사태는 점점 어렵게 되었다.


하루는 내무서원들이 갑자기 가택 수색을 했다. 

이 마을에서 여섯 명의 피난민이 있었는데 두 명이 붙들려 갔다. 

난 지게를 지고산에 나무하러 가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마을 노인들이 나머지 피난민들에 대한 의논이 있었다. 

마을의 피해를 적게 하기 위해 피난민을 보내야 한다는 쪽으로 

이야기되었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쯤 되니 결단을 내려야 할 고비에 이르렀다.
새벽 기도를 드리고 오는데 우물가에서 

다리를 저는 그네를 만났다.


우리의 사정을 안 그네는 무척 걱정하는 표정으로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다시 북으로 갈 수 없어 망설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네가 숨겨줄 테니 이 마을에 있으라는 것이다.
마을에서 이북에 가는 척하고 근처의 산에 숨어 있다가 

밤에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자는 것이다. 


이때 나의 심정은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고 매달릴 판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숨어 있을 때가 어디지? 

마을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궁금증에 싸인 채 근처 산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둡자 약속 장소로 갔다. 

그네가 오더니 자기 집 담을 넘어 오라는 것이다.


뒤꼍에 있는 장독대 빈 독을 옮겨 놓으면서 

그리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미 파 놓은 굴 안에는 침구까지 마련돼 있었고 

저녁 식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 굴은 그네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가끔 집에 들를 때 숨어 있기 위해 파 놓은 것이다. 

아버지는 올해 들어 소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그네만이 알고 있는 굴이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박선생과 함께 나를 

이 굴에 있기로 양해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낮에는 굴 안에 있고 이슥한 밤에나
살며시 나와 산책하며 바람 쏘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섬을 기지로 하는 우리 유격대원이 

이 마을에 가끔 들른다는 소식이다. 

알아보니 여기서 50리 가량 가면 증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물때만 맞으면 썰물일 때에는 걸어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탈출이나 성공한 것 같이 기뻤다. 

그네가 확인하기 위해 유격대원을 따라 밤길을 걸어 증산도를 다녀왔다. 
이틀 후에 떠나기로 한 날이다. 


아직 어둡지도 않은데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4월인데 때아닌 소나기가 쏟아진 저녁 때였다. 

남쪽 하늘엔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있는 것이 아닌가.


"저 무지개 있는 쪽이 선생님이 가실 섬이예요.

오늘 무사히 갈 수 있다는 길조예요."


그네의 마음씨가 저 무지개 빛 같이 곱다고 여겨졌다. 


"전 무지개를 볼 때마다 선생님 생각하겠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떠날 때 어머니께서 주신 

명주와 금붙이를 바랑에서 꺼냈다. 


그네가 사양하는 것을 억지로 고마움의 정표로 떠맡겼다. 
금붙이 속에는 반지가 하나 있어 그네 손에 끼워 주었다. 

나의 손도 떨렸지만 그네의 손도 떨렸다. 

그네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고개를 돌렸다. 


그날 밤에 나는 그네의 뒤를 따라 괴뢰군의 초소를 피해 가며
밤새도록 걸어 새벽녘에야 목적지인 섬에 닿을 수 있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네였다. 

 

겨울 바다 위에 서 있는 저 겨울 무지개의 미세한 물방울엔 

그네의 눈물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 왔다.
지금도 무지개를 보면 20여 년이 흐른 오늘에도 

그네와 함께보던 봄 무지개와 더불어 그네의 모습이 떠올라 나를 사로잡는다. 


그네는 아직도 시집을 가지 않은 채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는 

스무살 처녀 같이만 여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출처 : 미리내 문학관
출처 : 미황
글쓴이 : 또바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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