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통제사 경상우수사 이순신(李純信)은 해남현감 유형, 가리포 첨사 이영남,
군관 이언량, 송희립 등 역전의 휘하 장령들과 함께 출전하였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 부총병 등자룡과 진장
그리고 여러 유격장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조선 수군과 연합하였다.
한편 순천에서 행상의 퇴로가 차단되어 고전하는
고니시의 왜군단을 구출하기 위하여
남해 각처의 왜 수군이 결속하여 속속 노량을 향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약 500척의 조·명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왜교의 봉쇄를 풀고 급히 노량으로 진격,
다음날인 11월 19일 새벽 2시경,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의 타찌바나 토우도라, 부산의 테라자와 마사시게
그리고 남해에 있던 소오 요시토모등 여러 왜장이 합세한
500여 척의 왜함대와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이게 되었다.
해전은 춥고 달 밝은 밤의 전투였다.
각종 화포를 쉴 새없이 발사하고, 화시를 날리고 잎나무불을 마구 던지는 등,
치열한 야간 전투가 계속 되는 동안 밤은 서서히 트이기 시작하였다.
이 마지막 해전이 고비에 이른 19일 새벽 이순신은 몸소
지휘독전 중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적의 탄환을 왼쪽 가슴에 맞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군사들이 급히 그를 방패로 가리었으나 그는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이영남, 방덕룡, 고득장 등 10여명의 부장이 전사하였고,
해남현감 유형, 군관 송희립 등이 중상을 입었다.
임진년에 귀선돌격장으로 활약한 이언량도 이 싸움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명나라 수군의 70세 노장 등자룡도 전사하였다.
전과는 태워 버린 적선이 200여척, 적병의 머리가 500여 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란 이래 최대 규모의 격전이었다.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은 거칠고 오만한 인물로만 전해지고 있으나,
1598년 7월 16일 수군 5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한 후 4개월 동안 조선수군과 진을 같이 펼침으로써
이순신의 천재성과 인품을 가장 잘알고 지내던 유일한 타국인이었다.
그는 지휘군을 이순신에게 양보하게 되었고,
이순신또한 전리품과 적의 수급등을
명나라 수군에 양보함으로써 진도독의 명분과 공로를 위하여 인색치 않았다.
훗날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하여
고사에서 인용한 최고의 찬사를 이순신에게 바치고 있다.
그는 이순신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도 슬퍼하였고,
장례에도 남다른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으며
고인의 자제들을 친히 위로하는 예를 잊지 않았다.
또 이순신의 장지였던 아산 금성면의 묏자리 선정에도
명나라 지관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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