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런거 (19)]/˚♡카툰·만평·유머

어느 시아버지의 메일

또바기1957 2008. 5. 15. 04:55

무심천이 흐르는 청주는 조용한 도시다.

차도 막히는 경우가 별로 없는 조용하고 깨끗한 도시다.

강 영감은 오후에 친구들과 무심천 가에 놀러 갔다가

어둑할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강 영감은 아직 환갑도 안 지난 젊은 오빠(?)이지만

손자 덕분에 할아버지 혹은 영감으로 불린다.

 

43평 짜리 아파트에는 해외 출장 중인

큰 아들네 식구와 강 영감 부부가 살고 있다.

강가에 놀러 간 사이에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둘째 아들이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내려왔다.

 

그것도 묘령의 아가씨와 함께.

둘째는 재작년에 다녀가고는 처음이었다.

 

119 구급댄가 뭔가, 좋은 일하는 직장이라며,

힘들고 바빠도 보람 있는 곳이라고

언젠가 전화로 알려 준 소식이

강 영감이 알고있는 둘째 아들의 근황, 전부다.

같이 온 아가씨는 결혼 할 여자라며 소개시키려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 영감 부부가 늘 걱정의 꼬리를 끊을 수 없는

바로 그 문제를 바람처럼 나타난 장본인, 아들이

속 시원히 해결해 주었으니,

강 영감은 귀에 입술을 걸어 놓고 내려놓을 줄 몰랐다.

"아버지, 다른 건 다 준비했어요. 신경 쓰실 거 없어요.

그냥 친척들하고 가까운 친구 분들에게 연락만 좀 해 주세요."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지만 그래도 이건 인륜대사...

강 영감은 스스로 대사를 치르지 못하게 된 섭섭함을 끝내 감추지 못했다.

부인도 섭섭하기는 마찬가지다.

 

큰아들이 다행히 결혼 직전에 온다고 하니

별 문제가 없지만, 큰 일을 치르다 보면

무슨 골칫거리나 힘든 일이 생겨나서 어른으로서의 몫을 해야하는데...

아무튼 허전하기만 하다.

 

그나마 아가씨의 얌전하고 복스런 얼굴과 상냥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서 허전함을 조금 메워주었다.

큰 며느리 방에서 아가씨와 손자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별이 희미하게 박혀있는 하늘을 보며 베란다에서

한숨을 담배연기에 섞어 길게 내뿜자,

휘파람 소리가 얕게 길게 퍼졌다.

서울 어느 예식장에서 강 영감 부부는 무엇에 떠밀리 듯, 대사를 치르고 폐백을 받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된 결혼식은 끝나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는 아들 내외를 말없이 보내고는

적잖은 낮술에 취해서 쓰러져 잤다가 밤 아홉 시쯤에야 깼다.

 

냉수를 한 컵 들이키고 생각해 보니 이제

두 자식 모두 장가 들였다는, 아비로서의 홀가분함이

아침의 소슬바람처럼 싱그럽게 온 몸을 감쌌다.

 

곱게 단장한 새아기의 얼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는 사이, 강 영감은 이 곳이 청주가 아닌 서울이라는 것을,

친척집에서 하루 밤 묵고 있다는 현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면서 뭔가 생각나는 듯, 옆에서 자는 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강 영감은 쉽게 PC 방을 찾을 수가 있었고,

서슴없이 들어간 강 영감은

지난번에 받은 새아기의 명함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가 누군가!

청주시가 알아주는 쳇팅 도사!

쳇팅에 쏟은 땀이 어디 한 두 섬인가,

시간이 한 두 해였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PC 방 총각에게

여봐라는 듯이 열 개의 손가락을 바람처럼 놀렸다.

새 며느리에게 보낼 메일은 금새 화자가 되어 화면에 나타났다.

[하이~ 며눌, 무쟈 방가! 지금 울 아들하고 재미께 지내여?

드뎌 00을 장개보내니 나도 울 마눌도 다 홀가붕~~~~~~~~

근데 울 아들 술 넘 마니주지마.

그 넘은 속이 별로 안조아.


나 오늘 낮에 낮술 푸고 @$@ <=요러케 댓따. ㅎㅎㅎㅎ

암튼 너가튼 뇨자가 울 며눌되서 기붕 짱!. 울 마눌도 그래여.

그 넘 혹시 술 채스문 걍 자라. ㅋㅋㅋ너도 피곤하자나.
잘 자. 담에 바여. 바이~~~ 강 태공]

자신의 아이디를 또박또박 친 강 영감은 PC 방을 나오며 별도 안 보이는

서울 한 구석의 거무티티한 하늘에 대고 씨익 웃으며 한 마디 했다.

"새아기가 아마 멋쟁이 시아버지라고 좋아하겠지? 힛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