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하다.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나는 이 안개가 싫다.
혐오스럽다.
내게 적의를 품은 무엇인가가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다.
무엇인가?
아니, 저 멀리 노란 빛무리를 짓고 있는 가로등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뚜벅뚜벅 구둣소리를 울리며 가로등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실은 뚜렷해진다.
노란 불빛이 가까워지면서 시야가 밝아질수록 내 의식도 뚜렷해진다.
이제 확실히 기억난다!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것은 바로 그녀다!
하얀 블라우스에 초콜릿 색 주름치마를 입고
그 위에 너무 큰 아이보리 색 가디건을 걸친 그녀는 나를 보고 생긋 웃는다.
"이제 왔어?"
"또 너였구나.... "
"그럼 누군 줄 알았어?"
"왜 자꾸 날 기다리는 거야?"
"같이 돌아가려고."
"돌아가자고?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우리 둘의 집이지."
우리 둘의 집.
갑자기 불안이 엄습한다.
그 집의 무엇인가가 나를 꺼림칙하게 만든다.
"왜 그래? 집에 돌아가기 싫어?"
"당연하지. 돼지마구처럼 어지러운 집안에 들어갈 마음이 생기니, 넌?"
내 말에 그녀는 갑자기 발칵 소리지른다.
"자기가 그런 소리 할 자격 있어?
그래도 우리 둘 중에서 청소기 한 번이라도
돌리는 사람은 언제나 나였지 자기는 아니었어."
성질을 부리니 눈이 새파랗게 빛나는 것이 마치 무슨 길짐승 같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 놓고는 그래도 우리 관계가 아주 험악해지는 일은 원치 않는지
그녀는 이내 누그러진 말투로 말한다.
"걱정 마. 오늘은 청소 깨끗이 하고 나왔으니까.
무려 두 시간이나 쓸고 닦았어. 들어가 보면 놀랄걸?"
그러면서 따라오라는 듯이 먼저 몸을 돌리고는 앞장서서 걸어간다.
할 수 없이 나는 그녀를 뒤따라가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더 참지 못하고 멈추고 만다.
그녀는 짜증스런 얼굴로 돌아본다.
"왜 그래?"
"그거.... 닦았어?"
"뭘?"
"닦았느냐고?"
"그러니까 뭘 말야?"
"청소 안했지?"
"말을 분명히 해야 내가 알아듣지. 뭘 닦았니 안 닦았니 하는 거야?"
"싱크대 아래.... "
"와인?"
"그래, 와인."
그녀는 흐흐흐 웃는다.
뭔가 몹시 재미있는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그녀 특유의 저음을 내며 웃는다.
"흐흐흐. 와인 좀 엎질러진 게 그렇게도 신경이 쓰여?"
"더럽잖아."
"흐흐. 와인이 왜 더러워. 빨간 게 곱기만 하더라."
"난 기분나빠!"
"난 기분 안 나빠."
손톱만큼의 동요도 없이 그녀는 즉각 내 말을 부정한다.
그녀의 이런 침착함은 어쩐지 기분 나쁘다.
원래 이렇게 침착한 성격의 여자가 아니었다.
걸핏하면 파르르 떨며 금속성의 고함을 질러 대는 히스테리컬한 여자였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으로 나를 정시하며 말을 잇는다.
"우리, 솔직히 얘기하자구. 와인 좀 엎질러졌다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지금 자기."
"뭐?"
"그게 정말로 와인이었음 참 좋겠지?"
"무, 무슨 소리야?"
"실망했어. 원래 이렇게 비겁한 남자였어, 자기?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은 그냥 부정해 버리는 게 자기 방식이었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좋아, 좋아, 그게 와인이라 믿고프면 그렇게 믿어. 그런데 말야,
싱크대 아래 흐르는 그 뻘건 게 와인치고는 냄새가 너무 비릿하지 않아?"
눈이 다시 새파랗게 빛난다. 이상하다.
안개가 이토록 짙은데 고작 파란색 렌즈를 꼈을 뿐인 눈이
저렇게 선명한 색을 띨 수가 있나?
"너, 너가 무슨 얘길 하는지 난 도무지.... "
"비겁한 자식."
"뭐라고?"
"비겁한 자식이라고, 넌. 자기가 저지른 짓도 부정하려 드는 비겁한 자식.
넌 사내도 아냐. 버러지 같은 녀석이야."
"이, 이게.... "
"왜? 또 날 찌르려고? 부엌 바닥을 그 꼴로 만들어 놓고도 성이 안 차니?
온 집안을 내 피로 칠갑을 해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만해! 듣기 싫어!"
"그렇게 하고 싶음 또 그래 봐. 이제 와서 내가 뭘 두려워하겠어? 찔러 봐!"
"그만하랬잖아!"
나는 고함을 지르며 그녀의 목을 조른다.
숨이 막혀 검붉게 부풀어오른 얼굴을 하고서도 그녀는 나를 향해 증오에 찬 미소를 짓는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그녀의 목줄기를 움켜쥔 손아귀에 필사적으로 힘을 준다.
내 손가락들 사이로 양초처럼 그녀의 목이 녹아내린다.
아니, 이건 이상하다.
이런 현상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이 악몽에서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
눈을 떠 보니 침대 안이다.
곁에는 내게 등을 돌린 채 그녀가 누워 있다.
익숙할 대로 익숙한 그녀의 체취가 나를 감싼다.
살았다 싶다.
그건 역시 악몽이었다.
꿈속에서 얼마나 요동을 쳤는지 빳빳하게 풀을 먹였던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어쩌다가 그런 몹쓸 꿈을 꾸게 됐을까.
"야, 야, 좀 일어나 봐."
"으응.... "
그녀는 짜증스러운 소리를 낼 뿐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야, 좀 일어나 보라니까. 방금 내가 어떤 꿈을 꿨는 줄 알아?"
그녀는 여전히 돌아보지도 않고 짜증스럽게 투덜거린다.
"뭐야, 사람 잠도 못 자게.... "
"진짜 이상한 꿈이라니까. 들어 봐. 아주 무서운 꿈이야. 꿈에 내가 널 죽였어."
"그거, 꿈 아니야."
"뭐?"
"기억 안 나? 자기가 날 칼로 찔렀잖아."
그러면서 이쪽으로 돌아눕는 그녀의 얼굴에서 풍기는 악취가
마치 각목처럼 내 후각을 때린다.
검푸른 색으로 변색한 이마 아래 움푹 패인
두 개의 시커먼 구멍 가득히 구더기들이 우글거린다....
비명을 지르며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수근거린다.
"창피하게 왜 이래? 왜 소릴 질러?"
맞은편에 앉은 그녀가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다.
"사람이 앞에서 얘기하는데 조는 사람이 어딨어? 어젯밤에 대체 뭐했어?"
아아, 다행이다! 그건 악몽이었던 거다.
하얗고 동그란 귀걸이를 흔들어 대며 그녀는 계속 화를 낸다.
"내 얘기가 그렇게 지루했어? 그게 지루해 할 수 있는 얘기야?"
"미안, 미안. 무슨 얘기를 하던 참이더라?"
"기가 막혀서! 진짜로 잊은 거야, 잊은 척하는 거야? 나, 넉 달이래."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빨리 마음을 결정해 줘. 어떡할 참이야?"
"내가 결정하면 따를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어쩐지 이런 그녀의 말과 내 대답을
전에도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결정이 어떤 건지 안 들어 봐도 알겠군."
그녀는 혐오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지으며
담배를 꺼내다가 와락 곽째 구겨 버린다.
"왜 그래?"
"안 피울 거야."
"무슨 뜻이야? 왜 안 피워?"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는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힌다.
"담배를 왜 안 피우냐고? 뭘 생각하는 거야?"
"알면서 자꾸 왜 물어?"
"너, 생각이 있니 없니. 지금 우리 처지에 앨 낳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 우리 처지에 왜 사람을 집적였어, 그러게?"
틀림없다.
지금 우리는 전에 한번 했던 대화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제부터 조심성이 없었던 게 어느 쪽인가를 놓고 입씨름이 벌어질 차례다.
콘돔을 확실히 챙겼느니 어쩌니....
그런 조잡스러운 소리들을 꼭 되풀이해야 할까?
짜증이 난 나는 입을 다문다.
그런 역겨운 대화는 한 번으로 족하다. 그
러자 그녀는 재촉한다.
"내가 경고했잖아. 그날은 안 된다고. 기억나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분명히 경고했어. 그런데도 자기가 집적거리는 바람에 이렇게 됐어. 이제 어떡할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자기가 벌인 일이잖아. 모르는 척할 참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난.... 네 그 눈이 싫어."
"내 눈이 왜?"
"한국 사람 눈이 파란색이 뭐야."
"파란 눈이 어때서? 요즘 렌즈 끼고 다니는 애들 나 말고도 많아."
"왜 하필 파란색이야?"
"검은 눈으로 할 거면 뭐하러 렌즈를 껴?
렌즈 하나 갖고서 애국자처럼 굴지 마.
그거, 무지 촌스러운 모습이라는 거, 자기도 알지?"
어떻게 된 게 나는 다시금 예전에 그녀와 주고받았던 얘기 속으로 다시 끌려들어오고 말았다.
앞에서 하던 얘기와는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했던 얘기지만
이 역시 언젠가 그녀와 내가 벌였던 입씨름의 반복이다.
아무래도 오늘 이 여자와 나는 입씨름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될 모양이다.
"말 돌리지 말고 빨리 결정해 줘. 이젠 더 미룰 수 없단 말야."
"시끄러."
"지금도 벌써 위험하다니까. 나 혼자 벌인 일이야, 이게?
왜 나혼자서 이 모두를 감당해야 해?"
"시끄럽다니까."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남자는 다 그래?"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번쩍이는 날을 가진 칼 한 자루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
"시끄럽다고 했지?"
나는 고함을 지르며 칼로 그녀 목을 긋는다.
"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막 강의가 끝났는지 강의실을 빠져나가던 사람들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돌아다보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아마 뭔가 이상한 소리라도 내었던 모양이다.
옆에 앉은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창피하게 왜 이래?
강의실에서 코까지 골며 자는 사람이 어딨어?
어젯밤에 뭐했어?"
"내가....잤어?"
"코까지 드렁드렁 골았다니까.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
강의시간에 그렇게 졸고도 학점이 잘도 나오겠다."
학점? 대학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학점 타령이지?
그리고 이 여자가 왜 여기 앉아 있지?
나랑 같은 대학도 아니었으면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다.
기분이 나쁘다 못해 암담하기까지 하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씨익 웃으며 그녀는 말한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할까? 나, 벌써 넉 달이래. 어떡할 건지 마음을 결정해 줘."
"이 얘기는.... "
"맞아. 이 얘긴 카페에서 했던 얘기지 여기서 한 얘기가 아냐."
가학적인 웃음을 짓는 그녀의 뒷쪽 벽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내 시선을 따라 벽 쪽을 본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긴 더 못 있겠군. 자리를 옮겨, 우리."
할 수 없이 나는 줄레줄레 그녀를 뒤따라간다.
우리가 지나간 복도 뒷편은 마치 이런 무대장치는 더 필요없다는 것처럼
걸쭉한 액체가 되어 허물어진다
"내가 경고했잖아. 그 날은 안 된다고.
그랬는데도 이렇게 되게 했으면 책임을 져야 당연하잖아."
공포영화 장면 같은 광경에도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녀는 또박또박 히스테리컬한 음성으로 나를 힐문한다.
"기억 안 나? 자기가 벌인 일이잖아. 이제 어떡할래?"
나는 그만 울고 싶어진다.
풀밭에 코를 박고 마냥 울고 싶다.
눈앞에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핀 풀밭이라도 있다면....
"아, 제비꽃?"
놀랍게도 내 마음속을 읽을 수 있는 그녀가 코웃음을 친다.
"그 냄새가 그렇게 마음에 들디?
걔도 참 웃기는 애야.
집이 그렇게 부자라면서 고르고 고른 향수가 고작 비올레타 디 파르마야?
역시 태생은 어쩔 수 없나봐.
향수 하날 봐도 싼 티가 팍팍 나잖아?
암만 떼돈을 벌었어도 졸부는 졸부일 따름이야. 그렇게 생각 안해?"
"은경이 얘기는 하지 마."
내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음울하게 나간다.
"왜 내가 걔 얘길 하지 말아야 하는데?"
즉각, 송곳처럼 뽀죽한 목소리로 그녀가 받는다.
"지금 우리가 이 난리를 치게 만든 장본인이 걘데 걔 얘길 하지 말자고?
자기가 애를 떼자면 떼야 하고, 관계를 정리하자면 정리해야 하고,
우리가 이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이런 상황 만든 그 계집애는
이름도 입에 올리지 말고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도록 만들어 주자면
난 또 그러도록 협조해야 해? 자기, 날 천사로 알았어?"
"은경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걔는 죄 없어."
"그렇지. 죄인은 바로 자기지. 자기도 아네?
그래, 여자한테 애까지 배게 만들어 놓은 자식이 딴 여자한테 한눈을 팔아?"
"이건 분명히 하자.
은경이 때문에 너와 헤어지려 했던 게 아냐. 관계 정리할 생각이 먼저였고,
그 다음에 은경이가 등장한 거야."
"그러셨어? 참 절묘한 타이밍이네?"
"내 말을 믿건 안 믿건 그건 네 마음이지만.... "
"물론 안 믿어."
"그렇다면 이런 얘기 자체가 도대체 의미 없는 얘기잖아?"
"어차피 무슨 얘기를 하건, 무슨 짓을 하건 의미가 없어진 상황까지 와 있어, 지금 우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푸른 눈이 매섭게 빛난다.
다시금 암담함이 엄습한다.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핀 풀밭에 코를 박고 울 수만 있다면!
"솔직히 얘기해 봐. 그 계집애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디?
키도 작고 얼굴도 죄다 뜯어고친 거잖아. 걔가 내세울 건 단 하나,
제 아빠가 자기가 다니는 회사 사장이라는 사실뿐이잖아.
그게 그렇게도 유혹적이었어? 좀스럽기는.
기껏 노린다는 게 사장 딸이야? 왜, 회장한테는 딸이 없디?"
"닥쳐!"
내 손에는 다시금 칼이 쥐어져 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또 칼이야? 좀 다양한 메뉴를 제공해 줄 순 없어?
정말이지, 자긴 상상력이 너무 빈약하다니까."
"닥치라니까!"
격분한 나는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붉은 피가 솟구치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몹시도 천진스런 미소가 떠오른다.
마치 냇물 속에서 건져올린 알록달록한 돌에 매혹된 아이처럼
콸콸 흘러내리는 붉은 피에 매혹된 채로 그녀는 말을 계속한다.
"그래, 인정해. 자기가 다니는 회사 사장의 딸이라는 건 꽤 짜릿한 유혹일 거야.
하지만 사장 자리가 세습직은 아니잖아.
사장 딸을 갖는다고 사장 자리까지 손에 넣게 되진 않아. 그 정도는 자기도 알 텐데?"
"함부로 얘기하지 마. 은경이네 집안이 빵빵하다는 사실이
내게 상당한 유혹으로 작용했던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경이에 대한 내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냐."
"오, 그러셔? 그 계집애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가 메달에 따르는 포상금에 마음이 동했다고 해서
시상식장에 흐르는 애국가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이 진심이 아닌 건 아냐."
"오호, 무척 미묘한 차이점이네?
그런데 말야, 자기가 그렇게 사랑할 만한 가치는 있는 계집애였어,
은경이 걔? 그 계집애, 남자를 밝혀도 여간 밝히는 게 아니라더라.
별명이 선착순이래. 오팔팔 여자들도 걔보다는 더 청순할걸."
"말조심 해!"
"딴 남자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가 그렇게도 먹음직스럽디?
자긴 자존심도 없어? 그따위 창녀 같은 년 때문에 나를 죽여?"
"닥치지 못해?"
나는 악을 쓰며 안간힘을 다해 그녀 가슴 깊숙이 칼을 밀어넣는다.
피보라가 솟구친다.
뜨거운 피가 용암처럼 머리 위로 쏟아진다.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간다.
붉은 피보라가 가라앉고 희뿌연 안개가 대신 들어선다.
물안개가 잔뜩 낀 강가에 나 혼자 서 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 내 복사뼈를 간지른다.
문득, 적막을 깨뜨리고 새 한 마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이젠 지쳤다.
내 속의 무엇인가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허물어지고 말았다.
강바닥을 내리치며 목놓아 울고 싶은 것을 나는 간신히 참는다.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자존심 때문이다.
하지만 한 줄기 눈물이 내 얼굴을 따라 흘러내려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갑자기 물속에서 하얀 손이 튀어나와 내 손목을 꽉 움켜쥔다.
새파란 두 눈을 부릅뜬 그녀의 얼굴이 뒤따라 떠오른다.
수면을 따라 해초처럼 남실거리는 검은 머리에 둘러싸인 얼굴이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묻는다.
"왜 그랬어? 왜 그까짓 애 때문에 날 죽였어?"
"이 손 놔.... "
"날 버린 건 그렇다고 쳐. 하지만 내 몸엔 자기 아이까지 있었어.
자식까지 죽여 가며 그 계집애한테로 갈 마음이 생기디? 그러고도 너가 인간이니?"
나는 그녀를 와락 껴안는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이건 너무해. 제발 날 좀 쉬게 해줘, 응?
얼마나, 얼마나 더 내가 널 죽여야 하니?"
그러자 그녀의 푸른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인다.
슬픈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한다.
"나도 어쩔 수 없어. 좋아서 이러는 게 아냐.
내 속에서 뭔가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것이 자꾸 올라와.
그게 멎을 때까지 계속 이렇게 뱉어낼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러더니 갑자기 빽 고함을 친다.
"그러게 왜 날 죽였냐고!"
여기까지 자판을 친 나는 손을 멈추었다.
피곤하다.
담배를 향해 손을 뻗는데 등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또, 또, 또.... "
레몬차 쟁반을 들고오던 그녀다.
"좀 봐주라. 오늘은 피울 자격 있단 말야.
쉬지도 않고 두 시간 동안이나 글을 썼다고."
"어디, 정말로 담배 필 자격을 얻을 만한 글인지 이 몸이 직접 읽고 판단해 줄게."
그러면서 그녀는 마우스를 빼앗아간다.
"읽지 마. 음산한 글이야."
"글이 음산해 봤자지. 응? 파란색 렌즈? 이거, 혹시.... "
"맞아. 글 속에 등장하는 여자 하나를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 자기를 모델로 삼았어. 미안."
"그게 왜 미안해 할 일인데?"
"나중에 그 여자가 죽게 되거든. 자기는 읽으면 기분 나쁠 거야."
"죽어? 내가?"
"응, 살해돼. 참혹하게."
"이 남자 좀 봐! 글 좀 실감나게 쓰겠답시고 날 죽인단 말야? 그래, 어떻게 죽일 건데?"
"글쎄.... 칼로 찔러 죽인다고 설정하기는 했는데, 그보다도 절벽 같은 데서 떨어뜨리는 걸로 바꿀까 싶기도 해."
"절벽에서 떨어뜨린다고?"
"응, 수면제를 먹여 잠을 재운 다음에 운전석에 앉힌 채로
차를 절벽 끝에서 아래로 밀어 버리면 어떨까 싶어."
"에이, 그건 너무 작위적이다.
역시 싱크대 아래 쓰러져 붉은 피를 흘리는 편이 더 자연스러워. 비쥬얼도 더 선명하고."
갑자기 가슴속이 얼음 조각이라도 삼킨 것처럼 서늘해진다.
싱크대 옆에서 죽인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는데?
"살인은 대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법이야.
자기가 말한 것처럼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
말싸움을 벌이다가 순간적으로 욱 하는 바람에 목을 조르거나 칼로 찌르게 되지. 자기도 잘 알 텐데?"
"너.... "
"몰라? 알잖아."
"너.... 너.... "
"높은 데서 떨어지는 건 자기 몫이야.
날 죽인 데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만취 상태에서 차를 몰다가
고가도로 아래로 튕겨나가 버리는 거지. 어때, 이쪽 시나리오가 훨씬 더 그럴듯하지?"
"이 지긋지긋한 년!"
나는 증오감에 몸을 떨며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상황에 신물이 난 나머지 속이 미식거린다.
"제발! 제발! 제발 이제 그만 좀 해라! 제발!
내가 자살이라도 하길 바래? 자살하면 날 풀어 줄래?"
그러자 그녀는 내게 목을 졸리우면서도 씨익 웃는다.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인데,
지금도 이미 자기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상태가 아냐.
말했잖아. 고가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아래로 떨어진다고."
"그런데도 아직 날 용서해 주지 못한단 말야?"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검은 덩어리가 그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어.
우린 이렇게 끝없이 서로를 증오하며 기나긴 시간을 보내야 할 거야."
"정말 너무하는구나.... "
"미안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내가 자길 미워하는 걸 용서해 줘.
내가 자길 용서하지 못하는 걸 용서해 줘.... "
마침내, 마침내 나는 꺼이꺼이 울고 만다.
그녀의 눈이 새파랗게 빛난다.
"그러게 왜 날 배신했어? 왜 날 찔렀어?"
나는 그녀를 껴안고 꺼이꺼이 운다.
"왜 날 죽였어? 왜 날 배신했어? 왜 날 아프게 했어?"
나는 꺼이꺼이 운다.
"왜 날 배신했어? 왜 날 배신했어? 왜 날 배신했어? 왜 날 배신했어? 왜 날 배신했어?"
나는 꺼이꺼이 운다. 꺼이꺼이 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사람 우는 것 같아요."
소독약을 묻힌 거즈로 남자의 이마를 닦으며 수간호사가 말했다.
매일 세심하게 보살피는 손길을 받는 남자의 얼굴은 멀끔해 보였다.
적어도 고가도로에서 십 여 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튜브들만 아니라면
두 달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하는 식물인간처럼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실룩실룩 간헐적인 경련을 일으키는
남자의 얼굴을 잠깐 살펴본 담당 의사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현상과 마주칠 때마다 그가 짓는 버릇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군.
의학적으로는 전혀 뇌손상을 발견할 수 없는데도 두 달째 식물인간 상태,
그러면서도 뇌파의 활동은 보통 이상으로 활발하니....
이런 케이스는 처음 보겠다니까."
"깨어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죠, 뭐."
간호사가 말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진실을 별로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때가 가끔 있는 법이다.
"어떤 현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이 친구가 알 수 있다면 그 말도 맞겠지만....
요즘은 경찰이 방문하는 일도 뜸해졌지?"
"언제 눈을 뜰지 알 수 없는 사람을 찾아와 봤자 소용없는 일이니까요.
대신, 약혼녀의 방문 역시 뜸해졌어요."
"약혼녀라 할 순 없지. 약혼식 이틀 전에 남자가 교통사고로 이 꼴이 된 거잖아.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상황 같아서는 파혼 당할 게 확실하고."
"당연하죠! 이 남자 원룸에서 딴 여자 시체가 나왔다잖아요.
나라도 당장 파혼하자고 나설 거예요."
"죽은 여자, 동거했던 여자라면서?"
"일 년 반씩이나요! 살해될 당시 임신 넉 달째였대요.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이런 남자를 이렇게 돌보는 것조차 꺼림칙하지 뭐예요."
"허허. 나이팅게일 선서를 한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면 안 되지."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요.
그렇게 죽여 놓고는 또 일 주일이나 그대로 방치해 두었었다잖아요. 소름이 끼쳐서....
남자들은 모두 사기꾼이라니까! 어머, 또 우네? 도대체 얼마나 슬픈 꿈을 꾸길래 이럴까.
선생님 생각엔 이 남자가 왜 이러는 것 같아요?"
"식물인간 상태에 놓인 사람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짐작이라도 해보세요. 요즘 이 남자를 사례로 논문 준비 중이신 거, 알아요."
"그 계획, 포기했어. 무슨 놈의 논문이 자꾸 소설이 되어 가더라고."
"그 소설이 궁금하다니까요."
"이 친구의 의식, 저 밑바닥에서 뭔가 격렬한 과정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이 참, 그거야 저도 아는 얘기구요. 그 격렬한 과정이란 게 구체적으로 뭐냐는 거예요."
수간호사의 끈질긴 물음에 의사는 문득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하고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 "
"네?"
"떨쳐낼래야 떨쳐낼 수 없는 것,
그것이 있어야지만 비로소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
죄를 지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리게 만드는 것.... "
"양심 말인가요?"
"그래, 양심. 지금 이 친구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자기 징벌 욕구일지도 몰라."
"좀더 쉽게 말씀해 주세요."
"이게 가장 쉬운 얘기야. 죄를 지은 이 남자의 자기 징벌 욕구가
구체적인 이미지를 띠고서 꿈으로 나타난다는 소리야."
그제서야 의사 얘기를 알아들은 간호사는 빙긋 웃으며 자신 있게 단언하였다.
"이 남자가 왜 자꾸 우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지금 이 남자는 꿈속에서 자기가 죽인 여자의
원귀라는 구체적인 이미지에 쫓겨다니고 있는 거예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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