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개전 초기 조선군은 실로 산이 무너지고 하늘이 내려앉은 듯 와해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군대 자체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었다.
2010년의 한국군 현역병의 별명처럼 "어둠의 자식들"같은 이들만이
군역에 처박혔을 뿐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평민들도 군포를 바치고 군역을 피했고,
전쟁이 터졌다는 전갈에 한양성 전체에서
소집한 군대가 기백명도 안되었던 나라의 군대가 무슨 힘을 쓰랴.
그나마 순변사 이일은 아예 그 군대조차 거느리지 못한 채
군관들만 거느리고 일단 남쪽 앞으로~~를 해야 했다.
이 이일이 경상도 상주까지 내려와 장정들을 억지로 불러 모아
창을 쥐어주고 일본군을 막을 채비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한 농민이 숨이 턱에 닿게 달려와 이일 앞에 엎드렸다.
적이 선산을 지나는 것을 보았으니 곧 일본군이 들이닥칠 것이라고 숨가쁘게 전했다.
하지만 이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정보였다.
대구에 적이 들어온 것이 3일 전이라는데 상주까지 2백리 길을
이틀만에 강행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일은 분노가 치밀었다. 안 그래도 군대라 부르기도 민망한 군상들을 데리고
어떻게든 해 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농투산이가
온 진중을 뒤흔들 소리를 떠들어대다니. 이일은 칼을 뽑았다.
그리고는 아마도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요망한 소리로 군심을 어지럽히다니. 너는 도대체 어느 나라 백성이냐.”
틀림이 없는 사실이라고,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울부짖던 농부는 그만 목 없는 귀신이 되었다.
슬프게도 농민의 말은 사실이었다. 적은 대구에서도 휴식 없이 강행군하여
이일이 농민의 목을 칠 즈음엔 상주 남방 20리에서 북상을 재개하고 있었다.
이일이 정찰만 내보냈어도 농부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수만 명의 대군이 20리 밖에서 진을 치고 잠자고 밥을 해먹고 있었는데
눈뜬 장님을 정찰병으로 삼았어도 일본군이 코앞에 온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아무리 전쟁 중이었다지만 20리 사이에 조선 백성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농사꾼이든 사냥꾼이든 처갓집에 다녀오던 선비든 그 움직임을 본 사람이 그 농부만은 아니었을진대
죽은 농부 외에 이일에 사태를 알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두 눈으로 본 사실을 그대로 아군에게 고한 농부의 목이 아군 장수의 칼에
호박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듣고서야 누가 감히 나서서 말할 수 있었겠는가.
군심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 유포죄를 뒤집어쓰느니
내가 헛것을 봤는갑다~ 여기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이일은 눈 가리고 귀 틀어막은 채 느긋하게 아침을 먹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고 그의 군대는 풍비박산이 난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수뇌부의 무책임이었다.
한양 사수를 부르짖다가 야밤에 서대문으로 빠져 도망간 선조는
1950년 서울 사수 방송을 대전에서 녹음했던 이아무개와 판박이거니와
기타 지방관들과 장수들도 도망가는 것 하나만큼은 귀신도 그런 귀신들이 없었다.
도망만 가면 다행이겠는데 제 일신을 안전케 하기 위하여
책임을 전가하거나 심지어는 거짓 보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가는 주제에
부산 첨사 정발은 띨띨한 장수이니 항복했을 것 같다고 장계를 올렸으며
앞서 언급된 이일은 “적은 진실로 신병(神兵)이라 당할 도리가 없었다”는
면피용 발언을 지겹게 써먹었다.
임진강 방어선에서 휘하 장수들의 결사적인 만류를 무릅쓰고
되지도 않을 반격 작전을 감행했다가 수비 병력의 태반을 말아먹은 한응인은 되레
“장수들이 용렬하니 신묘한 계책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라는 황당한 보고서를 올린다.
최악의 상황을 연출한 것은 다름아닌 도원수 김명원이었다.
임금이 떠난 한양을 지키기 위해 한강을 수비하던 도원수 김명원은
수만 명의 왜군이 한강 남쪽에 진을 치자 기가 질렸다.
어찌할까 고민하던 그는 부원수 신각의 항전 요청을 뿌리치고 작전상 후퇴를 결행한다.
그러나 신각은 그 명령을 어기고 한양 인근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치고 빠지는 수법으로 왜군을 괴롭혔고 약탈을 위해 본대와 떨어진 왜군들은
어김없이 신각 부대의 칼에 피를 뿜었다.
이 용장 신각을 잡은 것은 왜군이 아니라 도원수 김명원의 장계였다.
“신각은 부원수이면서도 도원수인 신의 명령을 듣지 않고 멋대로 양주로 도망쳤으니
이래가지고는 군율을 세우기 어렵겠습니다.”
명백한 허위 보고였고,
사태의 전말을 왜곡하여 임금을 속인 것이었지만
노발대발한 선조는 사람을 보내 신각을 죽였다.
신각이 보낸 장계가 도착하자 다시 사람을 보내 사형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신각의 목은 떨어진 뒤였다.
하는 일이라고는 도망밖에 모른 도원수가 싸우겠다고 나서고 실제로 공을 세운 군인을 죽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한강에서 도망가고 임진강에서 쫓겨나고
평양에서 무기와 쌀 다 버리고 줄행랑을 친 김명원은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도원수였다.
책임 추궁 따위는 없었다.
압록강가에서 천 리 가까이 강행군해 온 평안도 병사들이
하루만 쉬게 해 달라고 했다가 목이 잘려 나갔지만
그렇게 졸병들에게 엄하고 백성들에게는 가혹했던 군율은
도원수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김명원은 좌의정까지 해 먹고 종생했다.
이외에도 임진년 그 끔찍한 해에
조선의 정부와 군대가 벌인 삽질은 끝도 없고 한도 없다.
일본군의 조총이 위력을 발휘한 탓도 있겠고,
전국 시대를 거친 일본군이 워낙 강병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2백년 태평 세월에 군비가 소홀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속절없이 조선이 무너져 내린 가장 큰 이유는 공자님 말씀마따나 믿음(信)의 문제였다.
군대가 모자라서라기보다, 적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아래 위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자세가 실종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적군의 그림자만 비쳐도 십 리를 뛰었던 지휘관이
자기 위엄을 세운다고 군율을 시행한다면 어느 백성이, 어느 병사가
그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를 것이며,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것인가.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이라도 지휘관의 생각과 어긋날 때는
치도곤을 당하거나 목이 떨어질까 두려워 입이 막히는 군대라면
천지신명이 도운들 그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숱한 부하들 목숨을 적에게 상납하고 제 일신의 안전을 위하여
허위 보고를 서슴지 않는 군 수뇌부가 처벌은 커녕 포상을 받는다면
그 군대를 군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전쟁은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피하는 것이 옳겠지만 일단 전쟁이 일어난다면
지옥을 두어 번 왕복하더라도 이겨야 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아니 최소한 지지는 않을 정도의 능력은 갖춰 놓아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군대는 그를 위해 존재의 이유를 가질 터이다.
하지만 1592년 조선 정부와 국가는 그 의무감을 방기했고 존재감을 상실했었다.
2010년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나라에서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를,
비극의 재연이 이뤄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유성룡이 징비록을 쓴 이유도 잘못을 깨우치고 뼈아프게 반성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라는데
천안함이 침몰한 이후 나는 기습적으로 나의 뇌리를 포위 공격하는
기시감에 여러 번 몸을 떨었었다.
조총 쏘고 배 저어서 부산포에 상륙하는 시절이 아닌,
첨단 장비와 병기가 장성같이 둘러쳐진 시대에 1천 2백톤의 배가 두동강이 나고
46명의 소중한 생명이 사라졌는데도 이유조차 밝히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던 대한민국 국방부가
부산포에 왜군이 상륙할 당시의 조선 조정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 시작일 뿐이다.
폭탄주 열 잔 드시고 만취하신 합참의장님을 보위하고
기타 여러 장교들의 출세와 별자리를 위하여 1자에다가 획 두 개를 그어 4자로 만들어
사건 발생 시간을 조작하는, 이 상상을 초월하는 당나라 군대 앞에서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거짓 보고를 올려 부하의 목을 떨어지게 했던
김명원 따위는 명함도 내밀 수 없을 것이다.
현장에서 함정의 주포를 쏘아붙였던 일선의 장교가 분명히 잠수정이라고 보고한 것을
‘새떼’라고 둔갑을 시켜 버리는 그 담대함 앞에서
“적이 신병과 같아 상대할 수 없다”고 죽는 소리를 했던
이일은 그만 부끄러워 숨어 버리지 않겠는가.
아! 우리의 국군. 아! 우리의 장군들.
그런데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도, 그렇게 폭로를 당하고도
그 노고를 치하한다고 포상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니
도대체 이걸 무슨 낯으로 보고 어떤 귀로 챙겨야 하는가.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산 사람은 진급해야 하는가?
신뢰가 떨어진 자는 그를 회복하기 위해 상응하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신용불량이 된 이가 그 딱지를 모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지를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감사원 보고만으로도 군은 이미 믿음직한 우리의 국군이 아니라
미심쩍은 너희 벙거지들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천안함이 왜 침몰했는지에 대해서 연속 제기되는 문제가
비록 아니꼽고 저열하고 좀스럽다고 하더라도
그 하나 하나에 대해 성의 있게 답변해야 할 의무가 열 배는 생겨 버렸다.
그래서 신뢰란 무서운 것이다.
한 나라의 군인에 대한 공격은 그 나라에 대한 공격이고
군은 거기에 대응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공격의 주체에 의심이 제기된다면
그 의심을 없애는 것은 충분한 해명과 근거이지,
“할만큼 했다. 믿으려면 믿고 아니면 믿지 마라.”는 윽박지름도 아니고
“내 말을 안들으면 빨갱이”라는 협박도 아니며,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냐?”는
철없는 국적 확인 소송도 아니다.
나는 처음 천안함 사건의 범인이 북한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왔다.
이유로는 이제껏 고따우로된 교육을 받고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임진왜란 때의 조정과 병조같은 정부와 국방부의 행동을 보면서,
그 미욱한 장수들의 후신들같은 국방부 고위급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믿음을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당신들을 믿고 싶다. 당신들을 믿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이 혐오스러운 임진년의 기시감을 떨어 버리고 싶다.
참여연대의 UN 서한을 공격하기에 앞서서 그 오해를 풀고 토론으로 설득하라.
군사 기밀 문제가 있다고? 물론 그럴 것이다. 기밀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기밀의 누설이 아니라 신뢰의 상실이다.
“왜 이렇게까지 믿어 주지 않느냐?”고 한탄하지만
그 불신의 씨앗을 뿌리고 삽질로 흙을 덮은 것은 당신들이다.
결자가 해지해야 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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