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 천국으로 보내는 마지막 편지
고 정기선 씨 가족의 눈물 스토리
DATE 10-01-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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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1일 오전 7시경 도넛샵을 운영해 오던 정기선 씨가 무장강도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가정의 성실한 가장이자 따뜻한 남편, 자상한 아빠였던 그가 떠난 자리는 아내 정순희 씨와 두 딸 하빈이, 하윤이가 흘리는 뜨거운 눈물과 변치 않는 사랑으로 얼룩져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정순희 씨에게도 삶이 항상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이 있었기에 넉넉하지 못한 형편 속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하는 일상의 기쁨을 맛보며 지내왔다.
그런 정 씨에게 믿기지 않는 비보가 날아들었던 것은 불과 한달 전, 바로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얘기를 나누고 외식을 하며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줬던 남편의 모습이 생생하기만 한데 다음날 아침엔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왔다. “애들 결혼할 때 손잡아 준다더니…”
사건 당일이었던 12월 21일 오전, 캐롤톤에 위치한 도넛샵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정 씨는 경찰이 집에 찾아왔다는 딸 아이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경찰이 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겠다며 현재 있는 곳의 위치를 물어봤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또 강도를 맞았나 보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9시쯤 되니 가게 옆에서 일하는 조카가 전화를 해서는 대뜸 남편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언제였는지 묻더라구요.” 그 뒤 사복차림의 경찰이 정 씨가 일하고 있는 도넛샵을 찾아와 덤덤한 목소리로 남편의 사고 소식을 알렸다. 당황하는 정 씨를 두고 먼저 울음을 터뜨린 것은 큰 딸 하빈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다”며 오열하는 아이를 보면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던 정 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중얼거리며 한동안 경찰을 붙잡고 오기를 부려보기도 했다. “남편이 강도에게 총을 맞아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너무 원통한 것은 그런 사고를 당하게 되면 경찰들도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느라 금방 현장에 들이닥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겨우 현금 얼마 때문에 평생을 함께 할 남편을 잃어야 한다는게 너무나 억울했다. 평소 “나는 별 욕심 없고 애들 결혼할 때 손만 잡아주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다. 정기선 씨는 사고를 당하기 바로 전날,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망가진 장롱을 고쳤다. 외식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인데도 그 날만큼은 온 가족이 모여 특별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어했다. 식사 후에는 나흘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위해 딸들에게는 예쁜 핀도 사줬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가족들의 품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일을 하기 위해 새벽 12시경 집을 나섰다. “남편은 아이들을 굉장히 예뻐했어요. 다만 새벽에 일을 하느라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아무래도 가끔은 잔소리를 하게 되죠. 사고 전날은 유독 밥 투정하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예감이라도 한 듯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거나 정을 떼기 위해 역정을 내기도 한다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모두 맞는 말처럼 여겨진다고. 사고 전 함께 한 특별한 외출
정기선 씨는 가족들보다 주위 사람들을 먼저 챙길 만큼 성품이 좋은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는 미국에 갓 이민 온 사람들을 위해 거주 지역을 알아봐주고 아이들의 학교 입학은 물론 취업이 가능한 직장까지 수소문 하는 등 남을 돕는 일에 앞장 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자 그 많던 친구들이 하나 둘 멀어져 갔다. 그런 남편을 옆에서 지켜보던 정 씨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정 씨는 고인이 된 남편이 살아생전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었는지 실감하고 있다. 고인의 뒷모습 지켜줘 감사
“사고 후에 가게를 찾아 갔었는데 그동안 도넛샵을 오가던 손님들이 가게 입구에 놓아둔 인형, 꽃, 편지들에 깜짝 놀랐어요.”
정 씨는 사람들이 보여줬던 사랑과 염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갑작스런 사고 후 장례비를 치를 비용이 없어 걱정을 해야했던 정 씨는 장례식장을 찾아준 많은 한인들 덕분에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 특히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뉴욕, 어스틴 등 타주에서 먼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주었던 지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꼭 건네고 싶다고 전했다. “대통령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 남편이 가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해줬어요. 남편의 죽음이 그토록 초라했는데 가는 마지막 길까지 초라했었다면 오히려 제가 더 힘들었을 것 같아요.” 정 씨는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서 장례식장에서 1시간 가까이 멀리 떨어진 장지까지도 함께하며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 준 지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며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한 때는 왜 남편에게 그런 일이 생겨야 하고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 억울하고 원망스러워 일어설 기력도 없었다. 경찰 당국이 수사를 하겠다고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복면을 쓰고 나타났던 범인들이라 검거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행여 이대로 남편에게 해를 입힌 범인을 찾지 못하고 사건이 마무리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아빠를 향한 어린 딸의 사랑
그러나 이런 정씨를 일으킨 건 아이들이었다.
죽어도 범인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며 울분을 삭이지 못하는 엄마에게 둘째 딸 하윤이는 오히려 범인을 용서해야 아빠의 마음이 편하고 엄마가 잘 버틸 수 있다며 엄마를 달래기도 했다. 또한 경찰서 서장에게 편지를 쓰면 범인을 찾는 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엄마가 한국말로 하면 자기가 영어로 쓰겠다며 어린 아이답지 않은 의젓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겨우 12살이 된 딸 아이가 갑작스런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의젓하게 엄마를 달래던 아이가 평소에 안하던 행동을 해 엄마의 가슴이 찢기듯 아파온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둘째 하윤이는 평소에 아빠가 항상 모자를 쓰는 것에 불평이 많았어요. 근데 어느날은 하윤이가 아빠 모자를 쓰고, 아빠가 입던 티셔츠를 입고 집을 나서는 거예요.” 어떤 날은 아빠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보여주기도 하고,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라며 한글 학교에서 배웠던 한글 실력으로 편지를 쓰기도 했다. 아빠와 관련된 모든 신문 기사들과 편지, 관련 기록들을 스크랩하고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어른이 되면 꼭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을 하는 어린 딸. 아이의 핸드폰 앞 뒤를 가득 메운 ‘아빠 사랑해요’라는 글귀를 볼 때마다 그런 딸을 지켜봐야 하는 정 씨의 가슴은 더욱 아프고 불안하기만 할 뿐이다. 사건 초기 정 씨는 남편의 사고 자체가 믿기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신문과 방송 등 매스컴의 보도를 읽거나 보는 것 자체를 일부러 피했다. 사건 상황을 접하기 두려운 마음과 끓어 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모아놓은 신문 내용들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스크랩 하면서 모든 글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또한 기록으로 남겨 자상했던 남편이자 아빠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영원히 보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제 다행이라고 여긴다. 남겨진 자의 슬픔과 고통
현재 고 정기선 씨의 빠른 사건 해결을 위해 달라스 한인 상공인협회에서는 경찰국과 접촉을 시도해 범인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유가족이 지급받을 수 있는 위로금도 상향 조정할 수 있도록 건의서를 제출한 상태다.
유일한 증거자료로 쓰이고 있는 CCTV를 통해 확인된 바에 의하면 안타깝게도 범인이 복면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다. 정 씨는 개인적으로 달라스 지역 각 한인 커뮤니티에서 나서서 똑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도움을 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씩 마음을 추스려야 할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뒷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 상처 받은 아이들에 대한 염려, 남겨진 자의 슬픔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정 씨는 남겨진 가족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 놓여있다. 현재 정 씨가 마주한 세상은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 듯 하다. 그러나 많은 지인들의 보살핌과 격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듯이 한인들의 계속되는 관심과 염려만이 정 씨 가족들이 다시금 희망을 마주하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이 돼 줄 것이다. 2004년경 사업 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 정기선 씨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12월 21일의 안타까운 사고로 결국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고 말았다. 참 뭐라고 서두를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어.여보, 정말로 미안하고…. 당신만 보면 요즘은 더욱 그런 생각이 많이 나. 물론 살기가 힘들고 주위에 어울리는 사람들도 없으니까 그런다고 하겠지만 4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참 바보 같이 살아왔구나’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느껴져. 하빈, 하윤 커가는 모습, 잘 자라고 있는 모습 보면서 당신에게 더욱 고맙고 미안한 마음 뿐이야. 힘들고 좌절할 때 그래도 힘이 되고 버틸 수 있는 마음은 당신과 하빈, 하윤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또한 장모님께도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야. 항상 힘든 모습만 보여드리고 호강은 커녕 힘든 짐만 드리는 사위를 그래도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마음,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게. 여보, 늦었지만 당신이 한번만 더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정말 성실하고 가정에 필요한 신랑과 아빠, 그리고 사위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갈게. 한 두 번도 아니고 반복되는 힘든 생활에 내색도 안하고 참아주는 당신에게 그 어떤 것도 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요즘은 정말 밉고 저주까지 하고 싶어. 갑자기 일 나가기 전에 몇 자 적어봤어. 미안해 여보. 돌아갈 수만 있다면 원점에서부터 미국 처음 도착하는 각오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싶어. 미안해. 이정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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