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海 한승연]/˚♡。-프로필(약력)
구름뒤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정녕 올 수 없어 목마져 길었는가 가을비 이슬을 눈망울에 머금은 채 먼 빛으로 그리는 닿지 않는 하늘 낭자한 그리움 비단으로 펼쳐 방울벌레 서러운 들녘에 피었는가. 참으로 내게 있어 살아 마신 한 세월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질곡으로 점철된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오늘 나는 그것이 하늘이 내게준 축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마치 썩은 두엄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반짝이며 날아오르는 개똥벌레 그 형형한 몸짓의 미소를 지어본다. 궁극적으로 자연은 본 자연의 섭리속에 있었음을, 그 생명력이었음을, 그러기에 오늘 하늘은 내 삶의 근원적 변화를 요구하면서 무서리 속에서 또 다른 잎새를 피워내게 하지 않았는가 싶다. 어느 한 시기 죽음처럼 눈앞이 캄캄해오던 절망 속에서 액막이의 울음처럼 쏟아놓던 가슴앓이 사연, 그것은 끝내 창밖으로 흩날리는 낙엽에 사각거리는 유언에 눈물짓는 내 삶의 방관자가 될 수 없다는 새로운 시작의 몸짓 같은 것으로 "결코 하지 않는 것보다 늦게나마 하는 것이 낫다" 라는 라비우스의 말을 떠 올려 보게 하면서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거기에 또한 용기를 갖게 한 것은 미국의 작가 루이스가 어느 대학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던져준 질문의 교훈 때문이기도 했다. "너희들은 글쓰기를 원 하는가?" 이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물론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루이스는 이 말을 듣고 "그럼 집으로 가서 글을 쓰라"고 일언지하에 기답을 한 것이다. 루이스의 이 같은 말은 글을 쓰고 싶으면 "창작론" 강의를 들을 것이 아니라 당장 집으로 돌아가 글을 써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소설 기술론의 단적인 특성을 말 하고자 한 것으로, 소설에 기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의 전달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직접 글을 써 봄으로써 그 요체를 터득하게 된다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의 말은 새롭게 출발 하고자 하는 내 남은 날에 파란 신호등으로 켜졌었다. 시작이 반이라던가,마치 반쯤은 이루어낸 것 같은 손놀림이 "하면 된다"라는 심지에 불을 당기게 한 것이다. 그때 내게 보내온 격려의 박수가 또한 용기를 심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장르에만 구애 받음이 없이 보다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바탕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 체질,어떤 감성내지는 기지에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싶다." 라고 하지만 아직 나는 과목의 키 만을 측정 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그러나 이제 저녁 노을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손끝이 남은 날들에 내가 흘려야 할 땀방울들의 열정이 묻어 나옴을 보면서 미소짓는다. 그것은 썩은 두엄 속에서 몸부림쳐 온 굼벵이의 울음이, 내일쯤은 어둠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그 "반딧불이"의 반짝임 같은 것이 희망으로 거기에는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창조의 약속이 행복한 미소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구름뒤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말해 주는 하늘의 섭리를 다시 되새김질해 보게 하면서..... 2008.12.26 또바기 옮김
* 단축키는 한글/영문 대소문자로 이용 가능하며, 티스토리 기본 도메인에서만 동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