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영화 대박예고...문경 출신 독립운동가 박열은 누구?
해방 이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옛 혁명가, 반공 우익단체 활동도
서울의소리 ㅣ 기사입력 2017/07/08 [10:41]
경북 문경 출신 독립운동가를 다룬 이준익 감독의 신작 영화 '박열'이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대박행진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1902~1974) 의사에 세간의 관심 쏠리고 있다.
박열 선생은 1902년 3월 12일 광산촌인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이었다.
하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작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궁핍해졌다.
조선총독부 후원 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이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 각종 폐해가 뒤따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었다.
무정부주의자였던 선생은 18세 때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 전개를 위해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했다.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도쿄 고학생 동우회와 혈권단 등으로 항일활동을 펼치던 선생은
김약수, 원종린 등 유학생들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다.
일본에서 만나 결혼한 부인(가네코 후미코)과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항일세력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했다.
1922년 12월에는 김약수 등과 결별한 후 직접적인 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해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들과 연대활동에 돌입했다.
1923년 4월에는 흑우회와 별도로 반일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다.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소재 '박열의사 기념관' (사진= 문경시 제공)
선생은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를 시도했다.
의열단의 중요 간부인 김한을 만나 폭탄 구입을 요청하는 등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했다.
세차례에 걸친 폭탄 반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1923년 가을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게 되자 또다시 거사계획을 세웠다.
선생은 자신의 명성을 듣고 도쿄로 찾아온 김중한에게
폭탄구입 여부를 타진했지만 구입비용 때문에 잠시 보류했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도쿄에서 대지진(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일제는 대지진을 사회주의자 및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악용했다.
이 때 6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했다.
또 선생과 부인, 불령사 회원들을 포함해 조선인 6000여 명이 구속됐다.
선생은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부터 1925년 6월까지 총 21회에 걸쳐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특히 선생은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취급 중지, 동등한 좌석 설치, 조선 관복 착용,
조선어 사용 등 4개 조건을 요구해 일부 관철시켰다.
이에 따라 선생은 조선의 전통 관복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 등의
글을 읽으며 일왕의 죄를 폭로하기도 했다.
재판과정에서 사형판결 선고가 내려지자 박열 의사는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다.
사면장을 받은 부인은 현장에서 이를 갈갈이 찢어버렸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저항의지에 감동한 일본 재판장이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하며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지만 선생은 치바형무소,
부인은 도치키형무소로 옮겨지면서 둘 사이는 살아생전 영원히 이별을 고했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투옥된 선생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 변방의 아키다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이 돼 석방됐다.
옥중에 있는 동안 일제는 선생과 부인을 상대로 항일의지를 꺾기 위해
수차례 사상전향 공작을 펼쳤지만 그 때마다 실패했다.
이후 무려 22년 2개월 동안 옥중에서 끊임없는 투쟁으로 살아있는 독립운동 정신을 보여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인은 1926년 7월 도치키 형무소에서 타살로 의심되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교도소측에서 서둘러 가매장한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비밀리에 선생의 친형에게 전해져 문경 팔령산에 묻혔다.
선생이 석방되던 날 도쿄에서 열린 '석방 환영 대회'에서
그를 옥중에서 감시했던 형무소 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가 수천명이 운집한 조선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이날 참회의 뜻으로 자신의 아들을 선생의 양자로 바치고,
이름 또한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혀 주위를 감동시켰다.
조선의 전통 관복을 입은 채 재판을 받고 있는 박열의사를 재현한
박열의사기념관 전시실(사진= 문경시 제공)
해방이 되자 선생은 1946년 10월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해 재일조선거류민단을 발족시켰다.
초대단장에는 선생이 추대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 때 인민군은 선생을 북으로 데려 갔다.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문경시와 박열의사기념사업회는 이러한 박열 의사의 애국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2012년 생가 터에 박열의사기념공원 및 기념관을 건립했다.
기념관에는 박열 의사의 출생과 일대기, 유품과 사료를 전시해 박열 의사는 물론
평생의 동지이자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기념공원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와 박열의사 생가지가 보존돼 있다.
사회주의자 박열, '반공주의' 노선을 택하다
영화에서 박열은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나온다.
그래서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여 더욱 격렬한 활동을 펼치고는 했다.
그는 다이쇼 일왕, 왕세자 암살을 공모한다.
이 과정에서 발각된 박열은 부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수감된다.
암살 공모로 인해 박열은 '대역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부인 후미코는 결국 옥사한다.
여기까지가 '영화 박열'의 내용이다.
해방 이후에 박열은 일본 형무소에서 풀려난다.
약 22년 2개월을 복역한 끝의 일이다.
감옥에서 나온 그의 나이 43세. 아직은 젊은 나이였다.
재미있는 점은 그 다음부터다.
1946년 10월 3일, 출소한 박열은 재일본조선거류민단(현재의 민단)의 단장을 맡는다.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은 우익 성향의 교포단체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였던 그가, 우익 단체의 수장을 맡은 것이다.
오랜 수감생활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이때부터 박열의 본격적인 반공주의 행보가 시작된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백범 김구를 필두로 대대적인 반탁운동이 펼쳐진다.
박열 역시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위원이 됐을 정도로 말이다.
당시에 반탁운동이 '제2의 독립운동'으로 인식됐던 때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박열은 그러한 '제2의 독립운동'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반공주의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나 싶다.
▲1948년, 경교장에서 사진을 찍은 양근환, 김구, 박열 선생
ⓒ독립기념관
이 무렵에 박열은 역사에 남을 일을 해낸다.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삼의사 유해 송환을 도운 것이다.
삼의사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의 의사(義士)를 일컫는다.
그리하여 박열은 순국한 삼의사의 유해송환을 무사히 마친다.
박열의 노력으로 묘역이 조성됐다.
그것이 바로 현재 효창공원에 위치한 '삼의사묘'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총을 쏘거나 폭탄을 던지는 것처럼 '폼나는 일'로 여겨지지 않아서일까?
애석한 일이다.
반공주의자 박열, 전쟁 중에 납북 당하다
박열은 이후에도 활발한 반공활동을 펼친다.
1947년에는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글까지 신문에 실었을 정도다.
우익진영의 거물인 이승만과 두 차례 회담을 갖기도 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우익적인 색채를 표출한 셈이다.
민단간부들과 사진을 찍은 박열 선생. 가운데가 박열 선생. ⓒ독립기념관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박열의 이러한 독선적인 행보는 독이 됐다.
민단 내에서 불만이 터진 것이다.
결국 박열은 단장직에서 사임했다.
사임 이후에는 '박열장학회'와 '박열문화연구소'를 설립하며 인재양성 활동을 펼친다.
1949년, 박열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는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활동한다.
민단의 단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정치적인 활동을 그만둔 것이다.
아마도 지쳤으리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옛 혁명가는 유유자적한 삶을 원했다.
그러나 세상은 옛 혁명가를 가만두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3일 만에 서울은 함락됐다.
당시 박열은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일설에는 "국민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며 잔류했다고 한다.
결국 박열은 인민군에 의해서 납북당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다.
박열의 행적이 밝혀진 것은 사망했을 때다.
1974년 1월, 북한은 박열의 죽음을 통보했다.
옛 혁명가의 파란만장한 삶은, 결국 그렇게 끝났다.
파란만장했던 박열의 삶, 해방 이후도 기억하자
▲1974년, 박열의 추도식. 박열 선생은 건국훈장에 추서되기까지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열은 사망 후에 푸대접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되는 건국훈장에서 제외된 것이다.
어쩌면 사망 당시 박열이 북한 내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기에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박열이 북한 내에서 크게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일본 출신, 그것도 '전향한 반공주의자'를 북한에서 얼마나 대우해줬을까?
그렇게 옛 혁명가는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을 받는가 싶었다.
그럼에도 박열에 대한 발굴은 늦게나마 이루어졌다.
마침내 1989년, 박열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하면 늦었지만, 그래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교과서에도 박열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를 주제로 삼은 영화도 개봉했다.
하지만 애석한 점도 많다.
박열에 대해서 단순히 사회주의자로만 알려지는 점이다.
효창공원 삼의사묘의 유해송환을 시킨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는 단순한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반공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애국'을 위해서 그 수단으로 이념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만큼 박열은 단순하지 않은, 정말로 입체적인 인물이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애국자다.
혹시라도 박열을 '사회주의 빨갱이'라고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해방 이후의 행적을 알려주길 바란다.
끝으로 출옥 후에 박열이 남긴 말을 알리고자 한다.
1946년, <신조선혁명론>을 집필하여 남긴 말이다.
박열 선생, 이런 애국자의 삶을 기억하는 것도 후손인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나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온몸을 바쳐 온 독립운동의 일꾼으로서 한 병졸로서 일한다.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 것을 지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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