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차량 옆 인도에는 40대에서 60대로 보이는 농민들이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 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농기계인 트랙터와 트럭을 몰고 경찰서 앞을 찾은 농민의 표정은 영하의 날씨 때문인지 더욱 비장하게 느껴졌다.
이들의 정체는 지난 15일 '농정파탄! 국정농단! 박근혜 퇴진! 가자 청와대로!'라는 슬로건 아래
전남 해남에서 농기계 투쟁 출정식 갖고 청와대로의 행진을 시작한 '전봉준투쟁단(투쟁단)' 서군이다.
농민들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 진주와 해남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농기계 행진을 진행 중이다.
열흘간의 행진 일정 가운데 8일째를 맞이한 투쟁단은 피곤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열의를 불태우며 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들은 지난 일주일간 해남과 강진, 영암, 나주, 광주, 담양, 정읍 등 10개의 시군을 지나 14일 밤 충남 홍성에 도착했다.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가량 운전을 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은 300만 농민의 죽음"
"오늘 투쟁단이 홍성경찰서에서 출발하는 이유는 바로
고 백남기 농민을 향해 물대포 직사 살수를 실행한 최윤석 경장이 근무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부의장이자 투쟁단 서군을 이끌고 있는 이효신 대장의 목소리에서 울분이 느껴졌다.
행진 시작 전 만난 그는 "2015년 '1차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고인은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농민들과 함께
정부에 농민들의 고통을 호소했다"면서 "하지만 정부는 70대 노인을 물대포로 쏴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분노했다.
14일 오후 7시께 홍성경찰서 앞에 도착한 투쟁단은 힘든 일정에도 홍성 시민 200여명과 함께 촛불집회를 벌였다.
"우리 농민들의 현실이 더 이상 농사를 지어먹고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점점 늘어만 가는 빚이 농민들의 숨통을 움켜쥐고 있는 상황이죠.
고 백남기 농민은 이런 사실을 정부와 국민과 정치권에 호소하기 위해 70대의 나이에도 앞장서 나섰던 겁니다."
이 부의장은 투쟁단의 농기계 행진의 촉발제가 된 것 역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의 죽음 앞에 300만 농민들이 분노했고, 그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고인이 사경을 헤매던 지난 일년 동안 매일같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고, 심지어 사과조차 없었어요.
모든 농민들은 더 이상 이 정부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국민을 개돼지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죠."
이날 투쟁단의 행진은 예정된 오전 9시보다 20분 가량 늦게 시작됐다.
'박근혜 퇴진' 깃발과 '최순실 구속' 현수막을 달고 도로에 길게 늘어선 트랙터들의 행진은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영하로 떨어진 추운 날씨에도 많은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행진대오를 향해
"화이팅", "응원합니다" 등의 응원과 함께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시민들의 응원이 이어질 때마다 농민들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며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전봉준투쟁단 서군을 이끌고 있는 이효신 대장ⓒ민중의소리
"26일 더 많은 농민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으로 갑니다"
이날 투쟁단 농기계 행진에는 충남 농민들의 참여도 이어졌다.
행진에 함께하기 위해 얻어 탄 트랙터는 충남 예산에서 15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종수(43) 농민이 운전하고 있었다.
"과거에야 가을 추수가 끝나면 농민들이 한가했지만 요즘은 이모작은 물론이고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기 때문에
겨울에도 쉴 새 없이 일해야 하죠. 이게 다 정부의 농정파탄 때문이에요. 쌀농사 지어서는 먹고 살 수 없습니다."
1만 8천평 정도의 벼농사를 짓고 있는 그가 하우스를 하고 소까지 키우고 있는 이유다.
농사를 짓기 위해 꼭 필요한 농기계를 몰고 나온 그에게서 정부를 향한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저도 지금 빚이 5억원이 넘어요. 쌀농사만 지어서는 이자도 감당하기 힘들어요.
이건 저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농민들의 현실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빚만 늘어나는 게 현 대한민국 농민들의 현실인 거죠"
트랙터가 다음 목적지인 아산으로 향하는 내내 김씨는 충남 예산의 민심에 대해 말했다.
"지난 대선 당시 예산에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70%가 넘었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한 그는 결국
"지금은 마을 주민 중 대통령을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을 끝냈다.
"예산의 많은 농민들이 이번 주 토요일 서울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버스를 대절하려는 마을도 있고,
가족들과 다 함께 가려는 사람들도 있죠. 분명한 건 지난 민중총궐기보다 더 많은 농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찾을 겁니다."
한편 전봉준투쟁단을 비롯한 전국의 농민들은 오는 2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촛불집회에
트랙터와 트럭 2,000여대를 끌고 참여하기 위해 25일 서울로 진입할 예정이다.
하지만 농민들의 이 같은 움직임에 경찰의 반응도 심상치 않다.
앞서 경찰은 지난달 5일 전농 회원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예정된 집회 참가를 위해
1t 화물차 50여대에 대형 쌀포대를 싣고 한남대교 남단을 지나려 하자 '불법시위물품'이라는 이유로
길을 가로막은 바 있어 자칫 또 한 번 충돌이 우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