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보니 핸드폰 모서리에 금이 가 있다.
물건에 그리 애착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언제 상처가 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억에 없다.
상처란 그것이 발생하는 백 가지가 넘는 복잡한 사연과 달리
결과는 간단한 두 가지로만 나뉜다.
처음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과,
그리고 영원히 돌아 갈 수 없는 것.
사람과 달리 물고기는 미늘에 걸리면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는
그 극심한 고통과 다르게 정작 물고기 자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믿기지는 않지만 물고기에게는 사람이 느끼는 통증이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고기의 고통은 정작 물고기 자신이 아니라
순전히 그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의 몫인 셈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어쩌면 물고기의 통점 혹은 압점은
사람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가 당면한 고통이나 슬픔이, 쌀되를 계량하듯이 타자에게도
정확하게 같은 계량으로 작동 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나의 고통이 가깝거나 먼 타자에게는
그저 그런 하루의 일상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느끼는 진부한 일상이 어떤 타자에게는
차마 씻기 어려운 아픔, 혹은 기쁨이 되기도 한다.
사는 것은 본디 그런 것이다.
모든 비숫하나 다른 사람들의 눈과 키와 코가 다르듯이 그렇게 같을 수 없다.
그렇게 애초에 합칠 수 없는 것들이 우리들 각자의 실존하는 통점이고 압점인 셈이다.
내 밥그릇에 놓인 밥과 상대방의 그릇에 담긴 밥의 계량과 양이 애초에 틀린 까닭이고,
그래서 영원히 같을 수 없는 밥그릇의 질과 양을 가지고
너는 왜 나랑 세상을 보는 가늠이 같지 않느냐고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서럽다.
피해갈 수 있는 것은 모두 피해가고 싶었겠지만
그것들은 영락없이 모두 마주치며 우리는 그렇게 가난한 시간을 지나간다.
통점이나 압점이 사람의 이성으로 피해갈 수 있었더라면
신과 신을 위한 제단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지상의 헛된 바벨탑에 벽돌 한 장을 올리며 간혹 중얼거린다.
그것이 어떤 모습의 통점이건 간에 피할 수 있으면 피해가게 해 달라고....
첫 새끼 두 마리를 잃어버리고 금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렇게 다시 쌩쌩하게 살아나 먹이를 탐하고 다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숫컷 곁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 만순이를 보며 때론 좀 히안하고,
사실은 좀 많이 미웠었지...
하지만 암컷이란 이 세상을 나오면서부터 살아가는 고통들을 더 많이 안고 살아가고 있고,
그리고 그만큼의 깊이만큼 세상을 살아내는 질긴 유전자의 본능을 지니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통점과 압점에 대한 허망한 구분과 그리고 그녀에게로 향하는 근거 없는 내 원망을 접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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