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대야 오래 산다](19)/˚♡。─삶의이야기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7장 1-4절)

또바기1957 2016. 8. 5. 12:24

평소 성경을 즐겨 봉독하는 자세를 갖추지 못한 처지이지만 

이따금 불가의 화두처럼 좀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귓전을 잉잉거리는 성경 말씀들과 마주하게 되기도 합니다.  

오늘 그렇게 제 눈과 귀 앞을 어른거리는 성경 구절은 이것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 

(마태7장 1-4절) 

물론 이 말씀은 자기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남의 흐트러진 모습에는 눈꼬리부터 치솟는 인간의 모습에,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남의 일거수일투족에

시비의 눈총을 걸기에 바쁜 세상의 풍경에 던지는 추상같은 나무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같이 날카로운 가르침 앞에서

내 눈에는 들보가 없나니 이제 내 형제의 티끌을 보오리다 라면서

배를 내미는 작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의인 수보다 적겠지요. 

 

그런데 저는 엉뚱한 질문을 해 봅니다.  

 

저 말씀이 과연 비판을 금기로 선언하신 것인가,

네 눈에 들보가 없다는 확신이 없다면

아예 남의 눈의 티끌에 시비를 걸지 말라는 함구령인가,  

과연 그것이 주님의 뜻일까.   

 

그 의아함의 농도가 가장 짙어질 때는 저 성경 말씀이

'양시양비론'의 주요한 합금 재료로 사용될 경우입니다.  '

 

어떤 대상을 비판할 일이 있을 때

 

"네 말도 맞지만 상대도 이러저러한 면이 있으니 넘어가야 한다."거나

"너는 왜 비판하려고만 드느냐. 너는 털어서 먼지 안나냐? 

남의 눈에 티끌만 보지 마라"는 식의 '양시양비론' 말씀입니다.   

황희 정승이 두 여종의 싸움에서 양시론을 전개했던 얘기는 유명하죠.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 그러자 옆에서 부인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며

조정 일도 그렇게 하냐고 따지자 허허 부인 말도 옳소 했다는 일화 말입니다.   

 

그것은 황희 정승이 너그러웠던 탓도 있겠지만

시비의 당사자가 비슷한 처지의 종들로서 

권력의 강약이나 신분의 상하나 힘의 유무 문제로부터

자유로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그렇게 허허거리던 황희 정승이 조정에 나와서

김종서를 어떻게 쥐잡듯이 잡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예수께서 굳이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도 그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탄없이 서로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고, 그 처지에 차별이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자녀인 '형제' 사이라면 타인의 잘못을 지적함에 앞서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아름다운 미덕이자 마땅한 의무가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 역시 성전에서 비둘기 팔던 이들과

그들에게 필시 자릿세를 받아먹었을 제사장 등등에 맞서실 때

그 신중함을 발휘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렇듯, 비슷한 처지의 두 여종이나 형제의 아웅다웅이 아니라,

권세가 있는 자(집단)과 그에 항거하는 축이 부딪칠 때,  

지체가 높고 가진 것 많은 이들과 반대 처지에 선 이들의 이익이 충돌할 때,

물리적으로 힘이 있는 이가 힘 없는 상대를 굴복시키려 할 때, 

그 와중에 벌어진 싸움과 시비에서 양시양비론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강한 자, 있는 자, 가진 자, 그리고 결정적으로

책임이 있는 자의 칼과 방패로 전락하게 됩니다.  

삼성이라는 거대집단이 저지른 탈세와 불법의 사실 앞에서도 너는 털어 먼지 안나겠냐?

우리 사회의 문제였다 라며 얼렁뚱땅 얼버무리는 것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내에게 "네가가 뭔가 맞을 짓을 했겠지."라고 훈계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부하 여군 장교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고급 장교를 두고 

"앞길이 창창한 현역 장교를 굳이 망쳐야겠느냐.

너도 창피한 일이니 조용히 넘어가자"고 던지는 회유에서, 

 

공연히 까발려 봐야 회사 망신이고 너희 둘 다 문제 있으니

입 닥치고 넘어가라는 상사의 으름장까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티끌과 들보를 동일시하는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히려 

그 해결의 열쇠를 감추는 어둠의 재료가 될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천정을 향했던 시선을 다시 성경으로 돌려 바로 뒤의 5절을 읽을 때

저는 예수의 말씀이 결코 네 눈의 들보가 무서워

남의 티끌을 들먹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네 눈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눈을 가린 들보를 뺀다면,

즉 편견과 오판과 감정이 배제된 눈길을 가진다면 밝은 천지를 대할 수 있을 것이고 

가능한 한 순결한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나로 네 눈의 티를 빼게 하라"

제기하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비판을 받을 자세가 되어 있다면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내 눈에 들보가 있을까 두려워 남 눈의 티를 지적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들보와 티끌을 빼지 않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제 눈을 밝게 하려는 노력이지 

내 눈이 밝지 못하다는 자괴걈에 눈을 감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진 자와 높은 자와 강한 자와 가해자가,

없는 자와 약한 자와 낮은 자와 피해자가 부딪친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양쪽의 티끌만을 찾아 양쪽을 동일하게 탓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약한 자 힘 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찬송 부르는 기독교인이라면 말입니다. 

 

 

오히려 어느 쪽이 티끌이고 어느 쪽이 들보인지,

어느 쪽이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낮은 쪽이었으며 아픔을 입은 편이었으며

손해를 감수하는 측이었으며 애통해 하는 자였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그를 위해 편견과 사심 없는 눈길을 가지고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날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지글지글 튀겨대는 폭염의 연속 입니다.

모쪼록 건강에 흠집 나지 않도록 생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