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문학 (15)]/˚♡명언·깨달음·삶

Cimon and Pero(시몬과 페로)

또바기1957 2010. 6. 15. 15:48


로마의 자비 (Caritas Romana)

 

 ★ 1612년 작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미술관 Rijks museum [라이크스 박물관] 소장

 


★1630년작 ★  러시아 쌍뻬떼르부르그의 Hermitage(에르미타쥐) Museum 소장

‘로마의 자비’라는 이 그림의  원 제목은 ’ Cimon and Pero(시몬과 페로)’.
로마 시대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라는 사람이 쓴 ‘기념할 만한 언행들’이라는 책에서
주제를 얻었는데 그 내용이 소설같이 감동적이다.

시몬이라는 사형수가 있었다. 그는 사형 집행일 까지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되는
벌도 함께 받았다. 마침 그의 딸 페로는 방금 아이를 낳았는데 감옥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페로는 감옥으로 아버지를 면회 갈 때마다
간수 몰래 자신의 젖을 아버지에게 물렸다.
딸의 젖을 먹고 아버지는 계속 살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당국에서도 딸의 효성에 감동, 아버지를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이 그림의 주제다.

이 주제는 당시 로마에서는 대단히 인기 있는 것이었는데 이 딸의 행위가 부모를 공양하는
가장 고귀한 사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많은 벽화들이 당대에 제작되었지만 중세에는 이 주제가 사라지다가
르네상스가 되면서  여러 화가들에 의해 다시 그려지기 시작하는데
이 주제를 그린 그림을 ‘로마의 자비 (Caritas Romana)’라고 한다.

이 그림이 주는 미묘한 분위기 때문에 삼류 에로틱 그림이라는 일부의 평가도
있지만 루벤스가 ‘육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작가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평가는 너무 지나친 게 아닌지?

루벤스는 이 주제가 좋았던지 여러 차례 그렸는데, 1630년에 그린 작품에는
창문 너머로 젖을 먹이는 장면을 숨어서 보는
간수들을 그려 넣어서 그림 전체에 묘한 긴장감을 주고 있다.

※루벤스는 어떤 화가?※

루벤스 [ Rubens, Peter Paul , 1577.6.28~1640.5.30 ]

플랑드르(동화 "플란더스의 개"로 널리 알려진 곳)의 대화가로서  북유럽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 화가이다.
1608년 이후 브뤼셀에서 총독의 궁정화가로서 그의 창작력을 잘 발휘하였다.
그는 뛰어난 두뇌와 훌륭한 외모, 원만한 성격을 인정받아 외교관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신화, 종교, 역사, 우화 외에 풍속화, 초상화, 풍경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활동하여, 2000점 이상에 달하는 정력적인 업적을 남겼다.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독일 지겐으로 피해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죽자 10세 때 가족과 함께 고향인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와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3년 뒤 14세에 랄랭 백작부인의 시동이 되어 귀족사회의 습속을 익혔고, 화가가 될 뜻을 세웠다. 15세 때 A.노르트(1562~1641), O.베니우스(1556~1629) 등에게 그림을 배운 뒤 21세 때인 1598년 당당히 안트베르펜화가조합에 등록, 23세 때인 1600년에 이탈리아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8년 동안 베네치아,로마 등지에서 고대미술과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당시 이탈리아의 바로크화가인 M.카라바조와 카라치파의 영향을 받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차차 명성을 얻는 한편, 만토바공의 인정을 받아 그의 사절로서 외교적 사명을 띠고 에스파냐로 여행하였다.
160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0월에는 명문 집안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 뒤로는 날로 높아가는 명성과 많은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루벤스 특유의 화려하고 장대한 예술을 펼쳐나갔다.
역사화,종교화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제재를 작품화하였는데, 파리의 뤽상부르궁전의 21면으로 이루어진 연작 대벽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는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루벤스 예술의 모든 특질을 담고 있으며 바로크회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현란한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듯한 색채와 웅대한 구도가 어울려 생기가 넘친다.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였으며 원만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626년 아내 이사벨라가 죽은 후, 1630년 16세의 헬레나 푸르망과 재혼하였다. 1640년 팔의 통풍이 심장에까지 번져 안트베르펜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