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 곽재구 작곡 유종화 낭송 박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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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4년 1월 1일 전남 광주 출생 학력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 ‘사평역에서’는 막차가 좀처럼 오지 않는 간이역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니라 약간은 쓸쓸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간난신고의 삶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대합실 밖에는 송이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는데 기다리는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톱밥난로가 지펴진 작은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목받지 못하는 변두리의 삶들, 그러므로 그 들은 말이 없고 기울어 어두운 그믐처럼 졸거나 감기에 쿨럭일 뿐이다. 아마도 몇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쓴 담배나 피워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삶에 지쳐 그저 막차나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작자인 나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는다. 톱밥을 던져 넣으며 생각해 보면 삶은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저 옛날 생각이나 하면서 침묵하는 것이 옳음을 우리 모두는 안다. 그나마 송이눈이 쌓여 눈꽃을 피우고 그 눈꽃이 들려주는 조용한 화음이 오히려 정겨운 것, 그렇게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언제나 그렇듯이 기다리는 사람에게 더딘 막차는 오지 않고... 이 시를 읽다보면 서글프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의 우리에게는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다가오는 그림 한 장, 말없이 서럽지만 따뜻한 무엇인가가 배어있는 이 그림에는 막차가 좀처럼 오지 않는 절망감과 막차는 기어이 온다는 희망이 함께 담겨 있다. 아니 실제 막차가 오지 않아도 좋다. 막차가 오지 않아도 우리 마음속의 막차는 언제나 우리를 향해 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차는 올 것이라는 믿음, 이것이 희망이다. 1990년대 중반 대전시 정동에 있는 희미한 술집에서 글 쓰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옆에서 언성을 높이는 한 무리 대학생들을 보았다. 가만 귀를 기울이니 그들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유가 이 시, ‘사평역에서’에 있었다. 실제로 사평역이 있느냐, 없느냐가 시빗거리였다. 나는 가만 다가가서 넌지시 ‘사평역은 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있다고 주장한 이들은 의기양양해졌고, 없다고 목청 높인 이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따졌다. 나는 다시 가만 ‘사평역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다들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핏대를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옥신각신 술을 마셨다. 그때도 아마 이 시의 배경처럼 송이눈이 내렸을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시인은 실제‘사평역’에서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사평역’은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다. 이 시의 무대가 된 ‘사평역’은 우리나라 철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곽재구 시인이 그렇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호사가들은 시의 배경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찾아낸 곳이 바로 남평역이다. 전라남도 나주시에 있는 경전선 남평역을 그 배경으로 지목한 것이다. 이유는 곽재구 시인의 고향인 광주에서 지척인데다가 역사(驛舍)가 고즈넉하고 아담하여 이 시의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의 배경이 어디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평역’은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단한 삶을 잠시라도 이겨내기 위해 가만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문밖에 내리는 송이눈의 화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위해 난로에 톱밥 한 줌을 던져줄 수 있는 사람들, ‘사평역’은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그 마음속에서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도 ‘오래앓은 기침소리’도 ‘낯설은 뼈아픔’도 다하나가 되어 ‘눈꽃의 화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삶은 모두 간이역이다. 또 경부선 지탄, 각계역으로부터 경전선 명봉역, 태백선 자미원역, 영동선 고사리역까지 우리나라 철길이 이어지는 모든 간이역이 ‘사평역’이다. 그러니 감기에 쿨럭이는 그대, 삶이시든 단풍잎 몇 개 같다고 느껴질지라도 한 줌 눈물마저 불빛 속에 던져주시라. 그 눈물 속에서 다시 불꽃 살아날 테니... 그 불꽃 다시 그대를 따스하게 감싸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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