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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추사의 세한도는 ‘연행의 산물’

또바기1957 2010. 2. 1. 17:26

[문화]추사의 세한도는 ‘연행의 산물’

2010 01/26   위클리경향 860호

ㆍ사신으로 청나라 수도 연경 방문 통해 학문적·예술적 업적 이룩

올해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연행(燕行) 200주년이 되는 해다. 연행은 청나라 수도인 연경에 사신이나 사신의 수행원 자격으로 가는 것을 말한다. 추사의 연행을 기념하기 위해 필자는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3월 1일까지 서울 관훈동 화봉갤러리)이란 전시회를 기획했고, 추사의 명작을 연구한 <세한도>(문학동네)를 펴냈다. 그런데 왜 추사의 연행을 기념하는 것일까. 추사에게 있어 연행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김정희의 <세한도>.

연행은 보통 세 사람의 사신과 그들을 수행하는 수행원, 역관 등 여러 관리로 구성돼 있었다. 정조 이전만 해도 연경에 간 조선 사신들은 대부분 청나라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청나라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도 않았다.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 서적을 수입해 지식을 쌓았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있어 청나라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청나라는 임진왜란에 도움을 준 형제국 명나라를 멸망시킨 원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 같은 인식은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청나라를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시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젊은 지식인들의 연행이었다.

부친 김노경 따라 첫 연행 나서
그들은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를 시작했다. 함께 시를 짓고, 저술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지식인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던 청나라 지식인들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었다.

송영방의 <추사선생영주적거도>.
이후 정조가 등극하면서 청나라 문물 수용이 본격화됐다. 청나라는 이미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북학(北學)의 등장이다. 정조는 재위기간(1776~1800) 동안 청나라 문물을 수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나라 문물의 무작정 유입은 반대했다. 철저히 준비된 상황에서 조선에 필요한 부분만 제한적으로 들여왔다.

그런데 정조가 사망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청나라 문물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연행은 지식인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당시 권력의 핵심에 있던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연행이 중시되면서 역관이 문화 매개자로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추사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이다. 각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여항(閭巷·중인 출신의 문예인) 지식인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추사의 제자 조희룡(趙熙龍)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는 바로 그런 당시 상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추사의 일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추사를 추사답게 만든 학문과 예술의 토양이었다.

옹방강 등 청나라 학자와 교류
추사의 연행은 1809년 10월에 시작됐다. 생원시에 막 합격한 김정희는 사신으로 연경에 가게 된 부친 김노경(金魯敬, 1766~ 1837)을 따라나섰다. 어쩌면 추사의 연행은 과거 합격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추사는 젊을 때부터 과거 공부에 크게 힘을 쏟지 않았다. 그 대신 청나라에서 들어온 최신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데 몰두했다. 김노경은 그런 추사를 마뜩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과거에 합격했으니 김노경의 입장에선 한 시름 놓은 셈이었다. 그해 12월 하순 연경에 여장을 푼 추사는 연경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인물들을 만나 필담을 나누고 의문점들을 해소했다. 그러나 귀국할 날짜가 다 되도록 옹방강(翁方綱, 1733-1818)만은 만날 수 없었다. 옹방강은 추사가 꿈에도 그리던 인물이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10년을 준비한 추사였다. 자신의 서재에 옹방강의 글씨를 수집해 놓고, 옹방강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보담재(寶覃齋)’란 당호까지 건 추사였다. 당시 옹방강은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 외부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추사는 너무도 초조했다. 추사는 부친 김노경에게 부탁도 하고 연경에서 사귄 친구들도 동원해 가까스로 옹방강을 만나게 됐다. 귀국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었다. 만남은 옹방강의 서재인 소재(蘇齋)에서 이뤄졌다. 그날의 역사적인 만남을 추사는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옹방강은 소동파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서재를 소재라 했으며, 그곳에는 소동파와 관련한 보물들로 가득했다. 나막신을 신은 소동파의 모습을 그린 <파옹입극도(坡翁笠圖)>, 나양봉이 그린 <설랑석도(雪浪石圖)>, 소동파가 쓴 <천제오운첩(天際烏雲帖)> 진적(眞跡), <언송도(偃松圖)>의 찬문(贊文) 글씨, 송판본 <시주소시(施注蘇詩)> 등 너무도 진귀한 자료들이었다. 이때 추사가 본 소재의 보물들은 하나하나가 추사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옹방강이 추사에게 보낸 편지의 영인본 <옹담계수찰첩>.
귀국한 추사는 편지를 통해 옹방강을 비롯한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를 시작했다. 1818년 옹방강이 사망할 때까지 추사는 9년이란 세월을 편지를 통해 가르침을 받았다. 추사는 이처럼 ‘연행을 통한 북학의 수용’이라는 틀 속에서 탄생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추사는 청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서·화에서부터 감상·금석학·경학·고증학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만의 경지를 구축함으로써 ‘19세기 조선 학예의 관문이자 북학의 종장’으로 군림한 것이다. 그는 평생 중국을 한 번밖에 다녀오지 않았지만 그의 학문의 출발점은 바로 북학이었다.

<세한도> 역시 연행을 통해 시작돼 북학을 통해 완성됐으며, 다시 연행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1810년 소재에서 본 <언송도>찬문 글씨는 <세한도>의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언송도>는 본래 소동파의 그림이었다. 소동파가 혜주(惠州)로 유배됐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소동파의 아들이 그 먼 곳까지 찾아왔다. 소동파는 그런 아들이 너무도 기특했다. 누워 있는 소나무 그림을 그리고, 찬문을 지어 머릿병풍을 만들었다. 추사가 소재에서 본 것은 바로 소동파가 쓴 찬문 글씨였다. 옹방강은 1794년 겨울에 소동파의 찬문 글씨를 구했다. 52자밖에 남아 있지 않은 조각이었지만 소동파의 다른 자료들과 함께 소재 안에 소중히 보관했다.

소동파의 ‘언송도’서 모티브 얻어
청대 화가들의 전기집인 <국조화징록>에 찍힌 추사의 인장.
옹방강의 친구와 제자들은 소동파가 그린 <언송도>그림이 전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소동파의 찬문을 바탕으로 <언송도>를 그려 보기도 했다. 옹방강은 또 1796년 12월 19일 소동파의 생일에 시를 지으면서<언송도> 찬문에 대해 ‘고송언개전기호(古松偃蓋全戶)’라는 싯귀를 읊었다. ‘고목이 된 소나무 비스듬히 가지 드리우고 집에 기대 있네’라는 의미이다. 바로 <세한도>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집과 소나무의 모습 그대로다. 추사는 일찍이 이를 그림으로 그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추사는 <세한도>를 그릴 수가 없었다. 소동파가 멀리서 찾아온 아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언송도>를 그렸듯이 추사 자신은 소동파와 같은 상황에 있지도 않았고, 그런 절개에 비견할 만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추사는 억울하게 제주도에 유배됐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연락을 끊었다. 그러나 이상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잘나가던 때나 제주도에 유배돼 있을 때나 한결같았다. 청나라의 최신 정보를 전해 주었으며, 귀한 책들을 보내 주었다. 한번은 이상적이 청나라에서 어렵게 구해 온 <황조경세문편>을 보내 왔다. 추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공자가 말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됐기 때문이었다. ‘날씨가 추어진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씀을 추사는 현실 속에서 체험한 것이다. 소동파의 <언송도>에 비길 만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붓을 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은송당집>에 실린 이상적의 초상화.
추사는 붓을 들어 30년 동안 준비한 모든 것을 <세한도>에 쏟아 부었다. <세한도>는 그렇게 탄생했다. <언송도>에서 시작된<세한도>는 장경(張庚)의 <국조화징록>을 통해 황량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소치(小癡) 허련(許鍊)과의 만남 속에서 새롭게 터득한 먹 사용법이 적용됐다. <황조경세문편>을 받은 추사는 참을 수 없는 그 고마움을 <세한도>에 담아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청나라 지식인은 그런<세한도>를 위해 기꺼이 헌사를 바쳤다.

‘추사를 보는 열 개의 눈’ 전시는 바로 이런 추사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기획됐다. 지금까지 추사라 하면 으레 글씨와 그림만을 이야기했다. 추사는 서화나 경학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했다. 경학이 학문이듯이 서화도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예일치가 뜻하는 바이다. 서화에 관한 추사의 업적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학문적 성취를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가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 낸 업적들의 역사적 맥락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추사 연구가 더 이상 추사 글씨의 진위나 따지는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추사가 바라본 그곳을 우리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전시는 추사 연구자가 제시하는 추사 이해의 해법이라 할 것이다. 추사를 알면 조선의 19세기가 보인다. 조선의 19세기를 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조선의 19세기는 추사의 연행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추사의 연행을 기념하는 또다른 이유이다.

박철상<‘포럼 그림과 책’ 공동대표>